책들의 우주/문학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지하련 2023. 5. 5. 07:44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지음), 송태욱(옮김), 문학동네

 

 

첫 책이 61세 때 나왔고, 그로부터 8년 후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살고 결혼했으나, 이탈리아인 남편이 죽자 1971년 일본으로 귀국해 일본문학을 이탈리아로 번역하기도 하고 이탈리아 문학을 일본에 번역 소개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5년 정도가 흘렀다. 어쩌면 그녀는 일본의 전성기를 살았던 문학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시선, 혹은 태도. 세상과 문학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인 양 표현하고 있기에 스가 아쓰코의 수필들은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929년 생이니, 그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고 하니... 

 

언덕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는 배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아버지에게 받아 오랫동안 간직했던 엽서의 흑백풍경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유럽 여행을 하던 아버지가 보내온 것이다. 나와 여동생 앞으로 온데다 한 집에 사는 아버지가 엽서를 보냈다니 신기하고 기뻤던 기억이 난다. (…) 엽서 뒷면에는 아버지의 각지고 반듯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라는 말이 있단다”라고 쓰여있었다. 다른 말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잊어버렸다. 왜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고 할까.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53쪽 ~ 54쪽) 

 

이렇게 20세기 초반 한국과 일본은 달랐다. 하긴 19세기 후반도 비슷했다. 국사 시간에 배웠던 마지막 조선통신사였던 1811년 신미사행 때 일본인들은 선진문물을 구경하기 위해 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개화개방을 하지 않은, 낙후된 나라 조선 사람들을 구경하러 나갔는데, 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음을 최근에서야 알고 꽤나 흥분했다. 위 문장을 읽으며 스가 아쓰코가 부러웠다. 글 중간중간에 묻어나오는 남편 주세페 리카에 대한 추억도 따뜻하기만 하니, 어쩌면 평생을 평화로운 사랑 안에서 살다 간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드는 건, 그런 삶이어야만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수필집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달까.

 

밀라노에서 자란 남편은 안개 낀 날의 고요를 좋아했다. “gio per I poumon(폐 속 깊숙이)” 안개를 빨아들이면 밀라노 냄새가 난다는 내용의 사투리 노래를 자주 불렀다. 심한 음치라서 노래라기보다는 두둥실 뜬 구름이 하늘을 맥없이 흘러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11쪽)

 

심지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창부의 죽음에 남자들이 길게 장례행렬을 이루었다는 전통가요를 감상적이고 아름답다고 표현할 때,  노래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감상적이고 아름답다는 단어가 어울릴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많은 이에게 사랑받은 로지나라는 창부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목숨을 잃자 일찍이 그녀를 알던 밀라노 남자들이 길게 장례행렬을 이루었다는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밀라노 전통가요가 있다. (31쪽)

 

마리아는 남편이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던 서점에 가끔 나타났기에 귀가한 남편이 그녀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밀라노에 오기 한참 전부터 이 ‘가톨릭 좌파’ 서점의 단골이었다. (140쪽) 

 

그리고 '가톨릭 좌파'라는 단어를 보고서 살짝 웃었다. 지금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고 한국도 종교로 뭉친 좌익 활동이나 레지스탕스 활동이 있기는 했으나, 잘 언급되지 않다 보니, 지극히 유럽적인 단어이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이 일본과 병합될 무렵 기독교를 중심으로는 계몽운동이 활발했지만, 좌익 활동으로는 보기 어려웠다. 천주교는 확실히 반-조선적이며(하도 박해를 많이 당해서) 정치적 결사체로 옮겨간 흔적들이 있으나, 기독교는 미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정치색이 거의 없었다. 이는 현재도 비슷한 듯하여 흥미롭다. 반면 일본은 마치 인도같아서 종교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곳이라서 가톨릭 신자라고 알려진 스가 아쓰코가 유별나 보이기도 한다. 현재도 약 45만명 정도의 신자 밖에 없다고 한다.  1549년도가 일본에 가톨릭 선교사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 박경리는 <<일본산고>>라는 책을 통해 일본인들이 정신적으로 확실히 변화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계기가 로마가톨릭이 아니었을까 이야기하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이라는 나라도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성리학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자발적 신앙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순교를 한 거의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번 책이 두 번째로 읽는 스가 아쓰코의 수필집이다. 스가 아쓰코의 수필집은 추천할 만하다. 뭐랄까. 다 읽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여러 이탈리아 작가들과 작품들은 덤으로 받는 선물같다. 

 


젊을 적 나는 달마티아
바닷가를 떠돌았네, 먹이를 노리는 새가
어쩌다 머물고 가는 암초는, 미끈한
해초로 뒤덮여, 파도 사이로 보였다 말았다. 
태양에 빛났네, 에메랄드처럼
아름답게, 조수가 밀려오고, 밤이 바위를 감추면,
바람을 따라 돛단배들은, 먼 바다로 나갔네. 밤이 
높은 덫에 질리지 않도록, 오늘,
나의 왕국은 저 무인지대
항구는 누군지 모를 이를 위해 등불을 밝히고,
나는 홀로 먼 바다로 나가네, 아직 설레는 정신과,
인생에 대한 참혹한 사랑에, 씻겨.
- 움베르토 사바, <율리시즈>, (시집 <<지중해>>(1946) 중에서) (153쪽 ~ 154쪽)

 

대체로 이탈리아 시는 이른바 리얼리즘으로 이어지는 단테 계통, 허구성과 형식 쪽으로 기우는 페트라르카 계통으로 나뉘는데, 사바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속한다. (158쪽)

 

한국은 번역문학도 편향성이 심해서 독일, 프랑스 문학 중심으로 소개되다가 집중적으로 일본 문학으로 흘러갔다가 최근에는 영미문학이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다. 불과 몇 십년전만 하더라도 현대 영미문학은 거의 번역 소개되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상당히 의아스럽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독일 문학과 프랑스 문학이 압도적이었다. 문학 전집으로 나왔던 헤밍웨이가 거의 유일했다고 할까. 이렇게 보면 이탈리아 현대문학은 아예 국내 독자가 번역서로 구경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도 아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움베르토 사바(Umberto Saba)는 더더군다나 ... 

 

움베르토 사바 Umberto Saba, 1883 - 1957

 

많은 슬픔이 있고,
하늘과 집들이 아름다운 트리에스테에는
‘산길’이라는 언덕길이 있네
… … 언덕 한 쪽에는 잊힌
묘지가 있네. 장례식이 끊이지 않는 묘지
… … 유대인들의
오래된 묘지, 내 마음 속에선
무척이나 소중한, 그 묘지 … … 
- 비아조 마린, <트리에스테의 길과 해안>, (수필집) 중에서 (160쪽 ~ 161쪽) 


움베르토 사바를 이야기할 때마다 아쓰코는 트리에스테(Trieste)를 이야기한다. 찾아보니, 이탈리아 북동쪽 끝에 있는 작은 해변 도시였다. 움베르토 사바는 이 도시의 오래된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유대인 게토는 아래와 같이 생긴 유대인 공동 거주지역이다. 유대인만 모여 살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아래는 베네치아의 유대인 게토 사진이다. 아래 가운데 작은 광장이 있는 곳이 바로 게토인데, 그 곳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건물들에 유대인이 거주하며 다리 한 곳을 제외하곤 다 수로로 막혀 있다. 

 

베네치아의 유대인 게토.

 

아, 그리고 사바가 태어나 살았던, 그리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중고서점을 하다가 떠난 트리에스테 풍경은 이렇다. 찾아보니 아직까지 사바가 운영했던 서점이 있고 그가 자주 갔던 카페도 있었다. 트리에스테 여행을 가야 되나... 

 

트리에스테 전경

 

James Joyce, Umberto Saba and their friends were guests of the still-existing Caffè Stella Polare

 

Libreria Antiquaria Umberto Saba

 

죽어버린 것의, 잃어버린 고통의,
은밀한 만남의, 말로 할 수 없는
한 숨의,

- 움베로토 시바, <재>에서 (226쪽) 

 

스가 아쓰코의 <<밀라노, 안개의 풍경>>를 읽고 여러 명의 이탈리아 작가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스가 아쓰코의 수필들은 다 좋아서 어느 책이나 읽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한 권으로만 멈추진 않을 듯 싶다.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2019년도에 읽었으니, 3년만에 아쓰코의 다른 책을 읽었다. 아마 올 해 한 권 더 읽을 듯 싶다. 오늘 같이 집에만 하루 종일 있는 편이 좋을, 비 오는 휴일에 스가 아쓰코의 책은 추천할 만하다. 그리고 늘 좋은 책을 번역해주는 송태욱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번역문학을 자주 접하다 보면 번역자들도 딱 정해진다. 이것도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한데 말이다. 나는 오늘 움베르토 사바의 시를 찾아읽어야겠다. 이탈리아어는 젬병이나 영어로 번역된 시들이라도... 

 

스가 아쓰코 須賀 敦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