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영화, 혹은 시네마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레네

지하련 2023. 5. 6. 10:17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L'annee derneire a Marienbad (Last Year At Marienbad) 
알랭 레네(Alain Resnais)감독, 알랭 로브그리예 Alain Robbe-Grillet 극작 
Giorgio Albertazzi, Delphine Seyrig, Sascha Pitoeff 출연

 

 

실은 이 정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들마저도 이 영화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상당수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역대 최악의 영화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은 이 영화를 누벨 바그 최고의 영화로 평가하지만,  막상 직접 본다면, 더구나 지금, 2023년에 보았다면, 아마 최악의 영화로 평가한 비평가들의 심정을 이해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뒤늦게 본 것일까. 아니면 이젠 세간의 관심사에선 사라지고 영화 교과서에서나 등장할 법한 영화로만 생각하고 리뷰같은 건 올리지 말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이 영화가 가진 가능성, 독창성은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하다. 마치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을 처음 읽고 감탄했던 그 지점들을 영화적으로 그대로 옮겨놓았음에, 누보로망의 영화판이라고 여기질 정도로 폐쇄적이고 독단적이고 자기-의식적인 측면은 놀랍고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그러나 이것은 영화적 감동이 아니다. 이것은 예술 형식, 장치, 연출, 기법에 대한 놀라움에 대한 찬사이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바 영화적 이야기를 통한 감동이 아니다).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는 프랑스식 정원이 가지는 기하학적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다. 남자 X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어쩌면 자신이 상상해서 만든 것일지도 모르는), 행동, 독백, 일방적인 대화로 영화를 이끌어 나가며, 여자 A와 남자 M의 길을 잃게 만든다. 나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2023년에 이 영화가 개봉되었다면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형적인 가스라스팅 수준을 넘어서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며,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쏟아내는 X를 보며 집요함을 넘어 집착에 가까워, 정신병자처럼 여기질 정도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자 A는 자주 ‘내버려달라’고 하며 ‘당신은 미쳤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대화가 아니라 마치 여자A의 독백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남자 X는 여자 A의 말들 중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선택할 뿐, 나머지는 그냥 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적 연출은 누보-로망에서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이 소설은 일방적인 작중 화자의 서술에만 의지해 소설이 전개된다. 그래서 이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 화자의 상상인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작중 화자의 서술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독자를 그 독서를 이어나가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그 장르적 차이로 인해,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남자X의 독백만으로는 영화가 이어지기 어렵고 그렇다고 남녀간의 대화로 만들어내기에는, 그러한 순간을 담아낸다면 공감하기 어려운 스토리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 측면에서 알랭 레네와 로브-그리예의 협력은 나로 하여금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알랭 로그-그리예는 이 영화 대본을  ‘씨네-로망cine-roman’이라고 이름 붙이며 자신만의 소설 작법을 영화의 몽타주와 미장센으로 옮겨놓는다. 잦은 플래시백과 현실적이지 않은 롱테이크, 호텔로 개조된 오래된 바로크식 저택 안의 길게 이어진 복도와 방들이 가지는 폐쇄성, 그리고 그 공간들을 채운 장식들은 마치 등장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예측하게 해준다. 결국 인물들의 마음(심리)은 영화 공간과 뒤섞여 혼재되기 시작하며,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장면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혹은 등장인물 누군가가 상상하는 장면인지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을 정도로 파편적이기도 하다. 아니면 관객은 그것에 관심을 둘 여유도 가지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X의 대사를 따라가기도 바쁠 테니, 이것이 진짜인지, X의 기억인지, A의 상상인지 생각할 여력도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또 누보-로망 소설을 읽으면서도 참 수다스럽고 집요하며, 이렇게까지 왜 자신을 한 쪽 구석으로 몰아갈까, 그럴 정도로 현대인의 심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일까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서의 남자 X도 그런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나온 수십년 후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을 통해 스스로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인을 분석했다.  어떻게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는지 상세히 서술되고 분석되고 있으며, 이 점에서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정의 내린다. 다만 누보-로망에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자신을 염원하는 사랑으로 자신을 '피로한 상태'로 몰아넣는다면, 실제 현실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강요로 자신 스스로 막다른 길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어쩌면 실패하게 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모더니즘의 사랑이 이젠 전 생애 걸쳐 실패하게 될 자본주의적 인생으로 확대된 것일까. (더 씁쓸해지는 결론이긴 하지만)

 

 

카메라의 움직임은 상당히 흥미로워, 지금 봐도 신선할 정도다. 그래서 영국의 락그룹 Blur는 자신들의 뮤직비디오를 이 영화를 따라 만들기도 하였다(* Blur의 <To The End>).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이다. 인물들의 표정이나 움직임(동선), 위치는 연극적이며 어떤 구조화된 질서 속에서 영화의 장면들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장면들이 연속될 때, 관객들은 브레히트가 말한 바 ‘소격효과’를 느끼게 된다. 이 영화에서 이런 연출 기법들은 관객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서 알랭 레네와 로브-그리예는 이것이 픽션(로망)임을 자주 노출시키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기(사유)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1960년대와 2020년대는 너무 달라, 이제 우리는 1960년대를 그리워할 지경에 이르렀다(나만 그런가). 이제 사유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 누구도 사유하지 않는다. 그냥 따라가며 살기도 바쁘다. 영화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착각의 호수이며 무사유의 유토피아가 되어야 한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잠시 세상을 잊고 싶어야 한다. 아니면 내 인생의 거짓된 위로가 되거나 ‘이건 내 일이 아니야’라는 어떤 전언을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제 AI까지 등장해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위태롭게 한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느니, AI를 배우고 이용해야 된다거나.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현대사회가 강요하는 기술 환경을 거부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새로운 형태의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2020년대를 지배하는 많은 현대 문물이 파괴된 다음에서야 이 영화를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지금처럼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 찾고 보여지는 영화가 아니라, 1960년대 알랭 레네와 로브-그리예가 기대했던 바를 제대로 이해한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이 영화를 찾고 보게 되는. 하지만 그런 희망은 엄격하고 딱딱한 예술 애호가들만 기대하는 바일 뿐이다.

 

 

한국 최초의 누보-로망 <<경마장 가는 길>>이 나왔을 때, 한국의 문학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이야기를 했다. 소설가 하일지는 그 황당한 풍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보니,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의 남자주인공이 끊임없이 떠들어대던, 그 수다스러움과 이 영화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의 남자X와도 닮은 구석이 있구나. 그리고 여담이지만, 여 주인공으로 나온 델핀느 세리그가 입은 드레스들은 모두 코코 사넬이 디자인한 옷들이다. 흑백 영화라 색상을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이 영화를 두고 다양한 비평적 해석이 있지만, 누보-로망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면 그런 식의 해석 -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에 기반을 둔, 환자와 정신과 의사의 관계를 드러낸다거나 남자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환상, 또는 심리 게임 - 은 과도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의 비정상적인 관계 형성, 자기 중심적인 사유와 태도, 일방적인 주장들을 현란한 묘사와 교묘한 합리화를 통한 설득, 또는 자기 변호가 로브-그리예의 작품이 가진 특성이며, 더 나아가 삐뚤어진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영화는 이를 드러내기 위해 파편화된 반복과 프래시백, 정지된 인물과 롱테이크, 기하학적이고 연극적 무대로 구성할 뿐이다. 이런 장치들은 이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남자 X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공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지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는 아니다.

 

 

영화는 남자 X와 여자 A가 빈 손으로 호텔을 나가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과연 그들은 행복하게 살까 하는 질문을 던지자 상당히 씁쓸해졌다. 픽션은 언제나 현실을 불러들인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심리극에 가까워 보인다.

 

왜 예술은 끝내 실패하게 될 사랑을 노래하는 것일까. 우리들 모두가 실패한 사랑의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실패했으니 당신도 실패해야 된다는 질투 때문일까. 아니면 실패한 사랑을 노래하는 나를 보여줌으로써 누군가가 다시 나의 손을 잡아 주길 바라기 때문일까. 델핀느 세리그는 이 영화로 스타로 떠올랐다. 흑백 영화가 여배우의 매력을 더욱 더 잘 부각시킬 수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명암으로만 드러나는 얼굴이 가지는 매력이란….

 

Delphine Seyrig

 

한 때 여배우와 연애를 하는 게 꿈이기도 했는데, 내 주위에 몇몇 있던 여배우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찾아보니, 시인 박정대는 이 영화를 보지도 않고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라는 시를 적었더라. 그래서 여기에 그 시를 옮긴다. 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참 잘 옮겼다. 그래서 시인인가.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의 방은 그녀의 머릿결 속에 숨어 있었네
숲은 잎사귀들만으로도 어두웠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우리는 만났네
그녀의 방은 아주 조그만 다락방이었네
하늘은 칸칸의 별들을 하숙방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네
그녀의 옆구리에는 하나의 밤바다가 있어
물고기들 사이에서 외로웠네
외로움으로 하숙비를 지불하던 그녀를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나는 사랑했네
겨울 내내 도마뱀의 꼬리처럼 툭, 툭
끊어지며 눈이 내렸네 추억은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부터 생겨나네
나는 개들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네
그녀의 방은 그녀의 기억 속에 희미한 낮달처럼 꽂혀있었네
그녀의 문을 열면 아주 어두운 대낮이었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는 떠나갔네
그녀는 하나의 숲과 하나의 바다를 가지고 떠나가버렸네
툭, 툭 끊어지며 추억이 내렸네 눈이 내리고 있었네
추억은 또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창문을 닫고 있었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잉크로 그려진 애인들 노래를 부르네
아무도 그 노래를 듣지 못하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의 방은 어디에도 없었네 그녀는 그녀의 방을 가지고
그녀의 기억 속으로 떠나가버렸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나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로브그리예 원작.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시로 쓴다. 무지하다는 것은 때때로 무지하게 자유로운 것이다.

- 박정대, <<단편들>>(문학동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