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불의란 무엇인가, 대니얼 돌링

지하련 2023. 10. 7. 18:54

 

 

 

불의란 무엇인가 Injustice : Why Social Inequality Persists

대니얼 돌링(지음), 배현(옮김), 21세기북스

 

 

1.

생각은 깊어지지 않는 대신 많아지고 해결보다는 포기가 더 나은 선택처럼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다들 비슷하게 늙어가고 비슷한 생각과 습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 이것도 어쩌면 패거리일 수도 있고 카르텔일 수도 있겠다. 우습다. 결국은 목소리가 큰 권력자가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되었다.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나 행동 따위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저 대중들의 손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실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나 행동을 할 것이라 여겼던 이들조차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절망적인 회의감으로 물드는 가을날이다.

 

최근 몇 해 동안 기억에 남는 책들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것들이다.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 Why Equality Is Better for Everyone>>, 리처드 윌킨스 & 케이트 피켓(지음), 전재웅(옮김), 이후, 2012년(2010년 출간)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 Health, Wealth, and the Origins of Inequality>>, 앵거스 디턴(지음), 최윤희, 이현정(옮김), 한국경제신문, 2015년(2015년 출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 지그문트 바우만(지음), 안규남(옮김), 동녁, 2019년(2013년 출간)

 

위 책들에서 리처드 윌킨스과 케이트 피켓이 지은 <<평등이 답이다>>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우습게도 저 두 명은 역학자들인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여러 병적 증상들을 연구하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실은 우습다기보다는 너무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The Spirit Level>>은 그 당시 정말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 두 명의 학자는 바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불의란 무엇인가>>를 내가 왜 읽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 책 또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대니얼 돌링(대니 돌링 Danny Dorling)도 경제학자가 아니라 지리학자인데, 결국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연구하고 있다.

 

슈퍼리치는 주거 지역을 선택할 때 가장 제약을 받는다. (…) 그들은 서로 교제하고, 동일시하고, 편견을 공유할 다른 슈퍼리치들을 필요로 하며, 빈곤층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그들은 특정 지역과 특정 도시에 모여 있다. 우리는 분리의 증가를 말할 때, 인종이나 종교 집단의 분리를 생각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가장 분리된 사람들은 부유층이고, 더욱 불평등한 국가일수록 이런 현상은 증가해왔다. (235쪽)

 

지리적 격차의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원인인데,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가령 서울만 예로 들어보자. 빌라들이 빼곡히 모인 동네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놀만한 놀이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안에는 놀이터가 있어서 비슷한 또래끼리 모여 논다. 그리고 그 부모들이 서로 얼굴을 읽힌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긴 어떤 문제를 지리의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어느 것 하나 문제가 아닌 것이 없다. 기후위기는 너무 심각해서 대놓고 말하기 꺼려하는 주제/소재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면 좌파, 빨갱이라며 욕을 한다. 실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처지들을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도리어 그것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마치 베트남 참전군인들을 위해 고엽제 문제를 해결하고 지원하려고 노력했던 이들이 도리어, 도움을 받은 이들로부터 정치적으로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뭐랄까, 굳이 나서서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대 사회나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되고 전파된 것들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마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미스는 이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지금 선진국들의 경제를 조율하는 OECD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한 유럽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유럽경제협력 기구 OEEC를 모태로 1961년에 새롭게 창립된 기구로, 그냥 자기들끼리 잘 살아보기 위한 국제 조직에 가깝다. 이 기구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효율성 향상, 시장 체제의 단련, 자유 무역의 확대, 경쟁 촉진 등이다.

 

“OECD는 전혀 주저함 없이 인간 존엄성을 짓이기는 최부국들이 조잡하고 육중한 싱크탱크다. OECD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글로벌 자유시장이라는 불모지가 남는다.” (71쪽)

 

하나하나 잘못된 것들의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너무 거대하거나 혹은 너무 당연해서 포기하고 절망하게 된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인다. 아무리 스티븐 핑커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같은 책으로 주장하더라도 우울, 절망, 회의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최근 읽고 있는 <<2050 거주 불능 지구>>(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만 보더라도 인류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엘리트주의는 없어져야 한다. 결국 많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합리적인 사고와 풍부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지만, 그러한 이들을 성장시키고 만드는 과정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평범하게 자라나게 하는 것임을 나 또한 뒤늦게 알았다.

 

지금은 학교에서 IQ 검사를 하지 않는데, 예전엔 IQ 검사를 했고 IQ가 좋은 아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IQ 검사가 믿을 만한 것이지도 않았으며, 그것도 조작될 수 있었다. 교육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루소는 정반대의 지점을 향한다. 전자는 타고 난다고 믿었고 후자는 가르쳐야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고대적 의미에서의 타고 난다는 것은 후천적인 환경을 관심을 두지 않는 개념이었다. 하긴 후천적 환경에서의 교육 격차나 불평등이 심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언어나 태도, 관계 형성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줄 수 없다. 그러니 경제적 불평등이 그대로 교육 불평등, 학력 격차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의 IQ차이는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21세기 초에 다시 1940년대 불평등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엘리트주의에서 멀어지다가 백인에 대한 흑인의 사회적 지위와 상대적 빈곤이 변화하자, 엘리트주의에 다시 가까워진 것이다. (83쪽)

 

노예제의 종말은 미국 남부의 여러 주에 평등에 대한 두려움을 안겼다.(96쪽) 그 결과 엘리트주의는 자연스럽게 싹트게 되었다. 능력주의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엘리트주의 제도는 실력 사회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제도에서는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평등하지 않다면 아무도 실력에 맞는 곳에 갈 수 없다. 좀 더 평등한 사회에서는 “온갖 배경의 학생들에게 통합적 학교 교육을 시키는 것에 교육적 가치와 사회적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다. (…) 모든 불의는 인간의 실패와 함께 한다. 엘리트주의와 가장 짝이 잘 맞는 인간의 실패는 1950년대에 극에 달한 쇼비니즘이다. 전형적으로 쇼비니즘이란, 선택된 남성 소집단에 퍼진 내재적인 우월성에 대한 편향된 믿음이다. (100쪽)

 

한국에서는 외고나 특목고가 없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 영재 교육 따위도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이, 우리 아이들은 병 들고 낙오되며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가고 있다.

 

교육에서 엘리트주의가 가져온 가장 최악의 결과가 엘리트로부터 엿보인다. (105쪽)

 

이건 현 정부의 선출직 고위 관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공부만 잘한다고 그들이 옳거나 현명하게 판단 내리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최악의 쓰레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이름 없는 대중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처럼 되기 위해, 쓰레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한국은 다시 몰락할 것이다. (내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하지 마라. 조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정조 르네상스(이 단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가 끝나자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어졌고 결국 한일합방으로 귀결되었음을)

 

1950년대 유럽에서 차를 소유하지 않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다. 50년 후에는 빈곤의 척도가 된다. 1950년대 유럽,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가를 가지 않았다. 50년 후에는 휴가를 가지 않는 것이 빈곤의 척도가 되었다. (142쪽)

 

한국 사회만 이상하다고 여길 수 없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이미 OECD 선진국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다. 저자인 대니얼 돌링은 영국 사회의 여러 사례를 언급하며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언급한다(하지만 영국인들은 그 문제가 EU에 속해 있어서 생긴 문제라 여기고 브렉시트해버렸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답이 없긴 매한가지인듯).

 

불평등에 영향을 준 빈곤은 새로운 형태의 배제라는 형식을 띤다. 타인의 생활, 이해, 보살핌으로부터의 배제가 그것이다. 이제 빈곤은 비참한 빈곤상태에서 살아가야 함이 아니라, 매우 연속적으로 확장하는 사회적 기준에 따라 정해진다. 잉여 수입의 대부분이 최부유층에 돌아가고, 남은 잉여 수입이 그 다음 부유층에게 돌아가는 식이다. (134쪽)

 

돈의 문제는 너무 심각하다. 하지만 돈이 해결책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될 무렵이다. 근대의 계량적 가치는 부분적으로 돈의 가치로 환원될 수 있었고 새로운 가치 체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제 그 계량적 가치는 다른 가치 기준을 배제하고 오직 돈으로만 기준을 삼는다.

 

사람의 가치를 돈을 잘 버느냐에 둔다면 자존심을 지키고 사회적 강등을 피하기 위해 빚을 지는 게 중요해진다. 사회적 강등의 효과는 아담 스미스 이래 강경파 경제학자들조차 굴욕적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이 소비를 하고 빚을 지는 것은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이는 부자들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비롯된다. (143쪽)

 

빚을 내어 왜 소비하냐고? 왜 돈도 없으면서 인스타그램에 그럴싸한 사진을 올리냐고? 그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난한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이제 자존심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포장으로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이들에게서 희망을 앗아가는 어떤 시스템이다. <<평등이 답이다>>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결국 가진 자들, 부유층마저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진 다음이 될 것이다. 마치 한일합방이 되고 난 다음에서야 조선의 리더와 정치 체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듯이.

 

2001년 세계경제가 활황이었을 때도 영국의 아이들 다섯 명 중 한 명이 연간 휴가를 못 갔다. 부모들에게 여유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145쪽)

 

가끔 휴가를 내어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곤 한다. 체험학습신청서를 내면 1년에 16일 가량을 결석 처리 없이 사용할 수 있고 나도 아이도 아무렇지 않게 신청했다. 하지만 가게를 하는 이들이 아이와 함께 체험학습신청을 하려면 가게 문을 닫거나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 장사도 되지 않는데, 아이와 함께 가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리고 어느 뉴스에선가 체험학습신청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아이들을 놀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차 싶었다. 이 프로그램도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학력고사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대학수학능력평가나 학생부종합전형을 도입했거나 도리어 불평등은 더 심해져 버렸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차이가 있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것은 경우 20세기 동안이다. 그 전에는 군주나 성직자처럼 선택 받은 소수만이 차이를 타고 난다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149쪽)

 

인종 문제는 서구 사회에서는 오래된 사회 문제다. 그리고 한국도 이 문제로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종 차별이 결국 어떤 문제를 불러오는지 알리고 이를 미리 막고 해결할 수 있는 공감대와 정책들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아마 태극기와 성조를 함께 든 노인네들이 달려들어 빨갱이라고 날 공격하겠지).

 

우생학이란 결과적 사건으로부터 (명시적이면서도 암묵적으로도 주장하는) 능력 분포를 이끌어내는 과학이다. (153쪽)

 

우습다. 유튜브를 보면 국뽕에 가득찬 영상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영상들과 우생학을 같이 놓고 보면 아마 끔찍하지 않을까. 지금 한국 사회는 정말 위험한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

 

불평등이 커지면 불안감과 불신도 커진다. (177쪽)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두려움이 만들어낸 편견에 홀려 있다. 이런 두려움은 최근 몇 십년간 더 가진 자들이 덜 가진 자들을 보는 시각을 지배했다. 이런 두려움은 인종주의를 뒷받침하며 사회적 배제가 납득 가능하다는 생각에 힘을 보탠다. 이런 두려움은 엘리트주의를 등에 입었다. (197쪽)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능력이 없어서 불성실해서 그렇다고 매도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설득할 수 없다. 너무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경우가 많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니 절망적으로 나이든 이들에게서 투표권을 뺏어야 한다고 말까지 하게 된다.

 

기본적 필요를 만족시킨다고 해서 체면이 서지는 않는다.(183쪽) 그러니 빚을 내서 사치를 하게 된다. 외제차를 굴려야 하고 작은 단칸방에서 살지만 값비싼 위스키를 마시고 골프를 치러 나가야 한다. 체면의 문제이며 자존심의 문제다. 그리고 현대의 미디어들은 이를 조장한다. 어차피 오프라인에서 나를 아는 이들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다. 내가 관계를 맺는 이들은 인친이거나 페친들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들에게 내가 사는 공간을 보여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부국 인구의 5분의 1이 생계를 꾸려 나가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단지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절반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208쪽)

 

살아남기 위해 일해야 하는 미국에서는 65~69세 노년층 4분의 1 이상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보수 노동을 해야 하고, 70~74세의 노인 6분의 1이 그런 상황이다. (218쪽)

 

혹시 현대 사회가, 지금 한국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젊은 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만 탓하지 말고 한국 사회 전체가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을까?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학폭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고 자살을 하는 것이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며 시스템의 문제이며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올리고 대통령으로 뽑고 고위 관료로 선출해야 하는 걸 한국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걸까. 단연코 말하는데,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여기에 관심조차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이렇게 글을 올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런 이야기를 지껄일 계획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을 때는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불평등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모든 문제들은 한꺼번에 터질 것이다.

 

유럽과 미대륙, 일본에 1970년대부터 다윈 식 인종차별이 다시 일어났다.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소수에 불과한 데다 대부분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던 1970년대, 생존과 자기 발전, 그리고 적자들의 패권이라는 낡은 관념이 힘을 얻었을 때, 권력자들 사이에서 커져가던 인종 차별의 저항은 억압당했다. (221쪽)

 

집단을 형성하고 새 집단을 불러들인 것으로 표현된 국가는 투쟁, 불신, 불평등이 판치는 장소였다. 이는 불평등이 쉽게 섞이지 않는 사람들을 섞이게 하려는 시도의 결과라는 다문화주의의 대립항으로 제안되었다. 이런 생각으로 미국의 사회문제는 흑인을 다루는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결코 유럽과 동등하게 되는 것, 유럽인이 소유한 의료보험체계를 소유하는 것, 유럽인처럼 존중받는 국립교육을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었다. (221쪽 ~ 222쪽)

 

민족적 이질성과 균질성은 모두 신화다.(224쪽) 그러니 우리는 다양성, 다문화, 다인종을 받아야 들어야 한다. 타인의 상처를 보듬고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국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가 아닌 곳에서 그렇게 살아와 오늘에 이르렀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념이든, 종교든, 인종이든, 더 나아가 경제적 격차든.

 

좀 더 공정한 국가에서는 민족적 융합이 더 많고 종교적 융합이 덜 규정돼 있으며, 계급은 그리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224쪽)

 

하지만 유튜브만 봐도 온통 동일성, 균질성, 우월성에 대한 자극적인 영상들로 도배되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영상들 보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얼마나 망가질 것인가. 그리고 사회로 나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이 중장기적으로 사람들과 사회를 어떤 절망적 상황으로 몰아넣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동종 신화와 이종 신화의 공통점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 진화론이다. 사회진화론은 인간에게는 개별적으로 생존에 적합한 것이 있고, 이것은 좋은 것이므로 공중선을 위해 촉진될 수 있다고 제안하며 한 세기 전쯤에 강하게 자라란 움직임이다. (228쪽)

 

독일과 일본의 정치리더들이 신봉했던 우생학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주목받은 이유는 스탠포드 초대 총장이 우생학자임을, 그리고 우생학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생학이 전 지구적 흐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만국박람회에 전시하기 위해 데리고 갔을 때 그 어떤 도덕적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만국박람회는 ‘세계 엑스포’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열리고 있다.

 

 

2.

이 책을 읽은 건 작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노트에 적었고 그 옮긴 문장들을 다시 블로그에 올리면서 책 소개를 하고 있다. 예전엔 책에 대한 것들만 모아 올렸는데, 요즘엔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들까지 같이 모아져 글이 길어진다. 실은 정리는 되지 않고 나열되는 셈이다. 또한 개인적인 의견들까지 뒤섞여 들어가 과격해지고 대담해진다. 실은 이런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다고 할까. 하긴 전시를 보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음악을 듣고 연주가 어떻다고 나눌 이들이 주위에 사라졌거나 이젠 그것들과 멀리 떨어져 산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한 편으론 씁쓸한 일이기도 하다. 결국 미시사가 세상을 움직이지 않고 이제 다시 거대 서사가 세상을 움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은 불평등을 빠르게 상승시켜려고 규칙, 규제, 체제를 바꿨다. 그는 1988년에 대통령직을 떠났을 지 모르지만 그의 유산과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유산은 1920년대 이후 보지 못했던 수준의 불평등으로 되돌려 놓았다. (243쪽)

 

신자유주의를 노래했던 경제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가 경제적 불평등임을 알고 지금은 후회할까? 아마 젊었을 땐 신자유주의를 노래하고 나이든 지금은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할 것이 뻔하다(제프리 삭스 같은 경제학자가 여기에 속할지도).

 

사람들은 행복하게 양극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양극화를 위해 투표하고 행동할 것이다. (245쪽)

 

상위계층의 실제 소득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비뚤어진 도덕관은 다시 한 번 지지를 얻었다. 경쟁은 좋고, 협력은 나쁘며, 단지 몇몇 소수만이 재능을 가졌고, 그들의 재능은 정당하게 보상받아야만 한다는 도덕관이다. (261쪽)

 

“우리가 개인을 가치 있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똑같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말한다. 일견 옳은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개인의 자유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능력까지 포함하며, 경쟁과 자유의 그 극단까지도 옹호하게 된다. 우습게도 이걸 옳다고 한 때 한국의 리더들은 대처 총리를 높이 평가했다.

 

IMF 이후에서야 한국 경제는 본격적으로 글로벌 경제 시스템과 통합되었고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었다. IMF 직전 한국이 일본을 찾아가 부채 상환 유예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때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이것이 한국이 외환위기로 들어선 결정적 원인들 하나로 알고 있다. 이것 이외에도 현대 일본에 대해 한국이 열 받을 일들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그런데 이것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잘못 설계된 글로벌 경제 체제는 모든 문제들을 연결시켜놓았고 모두 잘 되거나 모두 망가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에 따라 달라서, 잘 될 때는 잘 사는 나라가 더 잘 살게 되고, 못 될 때는 못 사는 나라는 아예 나라 경제 자체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큰 문제가 없었던 글로벌 경제 체제 속에서 엘리트주의와 문화, 인종, 종교 차별은 지배적인 개념이 되었다. 

 

1950년대는 엘리트주의적 생각이 부유한 국가들에서 지속되었고, 1960년대에서는 국내에서 빈곤층의 배제가 용인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부유층이 통치를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반면 오늘날은 직접적 통치보다는 간섭, 선임, 개심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을 리더십이라고 부른다. (267쪽)

 

인종차별주의는 특정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다. (274쪽)

 

그리고 이제 한국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 나아가 여기에 대해 책임 지고 개선시켜 나가야 할 나라가 되었지만,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보인다.

 

부자들을 위한 세금 감면과 펀드매니저들의 과잉 상태를 보면 우리는 도금 시대로 돌아간 것이 틀림없다. 이 사태들의 중심에는 탐욕이 있다. (283쪽)

 

그리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국가와 정부의 리더들이 되었다. 한국의 국민들은 이를 용인하고 있다. 여론? 여론이란 없다. 여론은 미디어가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배웠고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위선적인 미디어가 만드는 정보를 수집하고 잘못된 생각을 옳다고 믿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해 빚을 지는 상황이 되면 말할 수 없는 박탈감과 비통함에 시달린다. 탈출구를 찾지 못할 때는 압박감과 분노가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특히 편모가정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경제적인 독립이 높은 가치를 부여 받은 사회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 George V. and Wilding P.(1999), British Society and Social Welfare: Towards a Sustainable Society. p.147 


지금 그 누구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들여다볼 것인가? 그런 죄책감과 수치심을 매번 마주하는 일선 사회복지 공무원의 노고를 알아줄 것인가? 미디어는 아무 관심도 없고 이젠 동료들도 관심 없다. 일손이 부족하다고 말만 할 뿐이다(나는 이것이 문재인 정부 때부터 누적된 것이라 생각한다).

 

1987~2005년 영국의 국민소득 수준은 4배에서 6배 정도 올랐다. 따라서 소득을 균등하게 나눈다고 가정하면 국민들은 4년 동안 아무런 소득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1987년에는 90일 정도 소득 없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5년에는 추가 소득 없이 버틸 수 있는 날이 열흘에 불과했다. 사실상 돈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95쪽)

 

영국의 상황은 브렉시트 이후 더 심각해졌다. 한국이 비슷한 상황으로 들어갈 것이다. 금리 인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며, 여기저기서 곡 소리가 날 것이다(어쩌면 내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현 정부는 경제적 무능력함을 정치적, 이념적 이슈로 포장하려 해결하고 한다. 포털 사이트(특히 네이버)에 올라온 기사들의 댓글을 보면 가관도 아니어서 댓글을 다는 사람들로만 나라를 만들어 따로 독립시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만 불평등한 사회에서 부자들조차 안녕하지 못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297쪽)라고 대니얼 돌링은 말하지만, 여기에서 부자들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자들은 다르다. 통계적으로 부유층들 대부분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그들 스스로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우습게도, ‘불평등의 심화로 심각해지고 치명적인 결과는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불평등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얻고 주장이 강화된다’(299쪽). 이런 상황 속에서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제대로 전망하고 경제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주어야 하지만, 그걸 기대하긴 어렵다.

 

주류 경제학은 “너무나 애매해서 주류 경제학자조차 그 지적 빈곤을 개탄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301쪽)

 

1960~1970년대 밀턴 프리드먼이 유형화했던 것처럼 경제학은 점차 인간의 이기심을 숭상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경제학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스스로 슘페터가 묘사한 정력적이고 우월한 개인이 되고자 했다. (303쪽) 이미 1947년 경제학자 요셉 슘페터는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는 “활력과 지성을 갖춘 남자들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고 했다.(302쪽)

 

주류 경제학자들은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도 부채를 산더미처럼 만든 장본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특히 미국에서는 시장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자기조정과정을 거친다는 믿음을 퍼뜨려서 비난받고 있다(305쪽)고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유명인사들은 떠받들고, 부자들의 삶을 부럽게 바라보는 문화는 이제 부국 사람들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엘리트주의, 배제, 편견하면 떠오르는 것이 맹목적 애국심, 편협함, 인종주의와 같은 인간적 결함들이다. 그런 결함은 탐욕 때문에 부자들의 새로운 나르시즘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나르시즘은 불안 때문에 돈을 쓰는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렇게 돈을 쓰는 이유는 자신이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기 존재감을 잠시나마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325쪽)

 

결국 블평등의 시대는 낭비의 시대라 할 수 있다(327쪽). 현대 문화는 여기에 집중되어있다. 모든 것은 소비와 낭비로 귀결되고 그 속에서 기업들은 살아 남는다. 기업이 살아남는 동안, 기후 위기를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인류 문명은 몰락을 향해 갈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사춘기 여자아이들의 7명 중 1명이 심각한 우울증을 보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이 아이들은 더 이상 자신이 유명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시점이 오는데, 이 때 아이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번지기 때문이다. (335쪽)

 

우울증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울한 개인들은 자연스럽게 환상으로 도망가게 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으로 몰려간다. 이것들은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 연결된 문제라는 점에서 미래를 더욱 불투명하게 만든다.

 

현대 도시는 지표면의 2퍼센트를 차지하고 동시에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를 수용한다. 한편 도시인은 자원의 75퍼센트를 소비하고 쓰레기의 75퍼센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 쪽에서는 도시를 선망하고 찬양하며 미래 도시에 대한 장미빛 전망을 쏟아내지만, 실은 현대 도시는 우리 문명의 무덤이 될 것이 뻔하다.

 

모든 아동의 7분의 1은 오늘날 비행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취급 받고, 모든 가계의 6분의 1은 사회 기준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5분의 1은 그럭저럭 살아가기도 버겁다. 약 25퍼센트 사람들이 생필품을 갖추지 못하거나 어렵게 구한다. 이렇게 풍족한 시대에! 이제 3분의 1은 식구 중 누군가가 정신 질환을 앓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그 선택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알려준다. (405쪽)

 

절망은 불가피하다. 이 책의 저자는 ‘국가 건강관리에 경쟁과 시장 중심의 시스템 도입은 위험하다’(373쪽)이라고 말하지만, 경쟁과 시장만이 아직도 옳다고 믿는, 다소 글로벌 트렌드에 뒤쳐진 한국의 정치 권력은 모든 분야에 경쟁과 시장 원리를 도입할 것이며,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은 더 심각해지고 해결 불능 상황으로 갈 것이다(정말 부탁하건대 그 상황이 된 다음 그 때의 정치권력에게 책임을 묻지 말기를).

 

불평등이 가장 만연한 곳에서, 그리고 가장 불평등한 시기에 사는 것이 심리적인 정신 상태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크다. (358쪽)

 

경제성장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인간이 새대가리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믿음과 기회만 있으면 먹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 믿음은 더 건강하게 먹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지 깨닫지 못한 절망의 속삭임이다. 우선은 적게 먹어야 하고, 육류를 먹지 말아야 한다. (392쪽)

 

글이 너무 길다. <<불의란 무엇인가>>라고 이야기하면서 불의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진지하게 읽는 독자를 순식간에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2011년 영국에서 이 책이 나왔으나, 2023년 현재 영국의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그냥 짜증나고 슬프고 암담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술을 줄이지 못하는걸까. 또 오늘 저녁 술이나 마셔야 하는 걸까. 모든 사람이 웃고 사는 행복한 미래 따윈 기대하면 안 되는 걸까. 정치인들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만, 그들조차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도생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정도는 국가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다.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투쟁은 망각에 대항한 기억의 투쟁”이다. (417쪽)

 

그래서 이렇게 길게 노트한 글을 옮기고 블로그에 올린다. 적어도 몇 명은 고민했다고 남기기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주제이긴 하지만.

 

“인간의 조건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인간의 기능과 행동 측면은 사회 생활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개인적 표현, 개인의 성취, 개인적 자유에 대한 현대적 집착은 사실상 자기 기만의 한 형태인 판타지일 뿐이다. “(420쪽)

 

의외로 대니얼 돌링의 책들은 몇 권 번역되었다. 다음엔 다른 책을 읽고 리뷰를 올릴까 한다. 그리고 <<평등이 답이다>>는 다시 출간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찾지 않는 모양이다. 영어판은 계속 새로 찍어내고 있는데 말이다. 아참, <<불의란 무엇인가>>도 절판이구나. 이젠 진지하고 심각한 책 따윈 읽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은 너무 크고 거대해서 한 개인이, 혹은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이제 없다. 이제 개인들이 모여서, 국가들이 모여서만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다.

 

(이런 점에서 거대서사는 끝나고 이제 미시 서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수십 년 전 그렇게 떠들어대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을 전파하던 인문학 교수들의 아구통을 날려버리고 싶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수입상의 역할만 했을 뿐이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거대 서사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으며, 거대 서사로 접근하여 논의하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도리어 이런 측면에서 서유럽이 마주한 문제들은 후기구조주의가 지향했던 반-이성의 흐름 속에서 도리어 비관과 절망, 무기력함에 빠져 더 깊은 수렁으로 접어드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Danny(Daniel) Dorling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