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언 프로이드 Lucian Freud
조디 그레이그(지음), 권영진(옮김), 다비치
설마 이렇게 책이 끝나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첫 장부터 끝날 때까지 저자는 각오한 듯이 루시언 프로이드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말하기로 작정했다. 루시언 프로이드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루시언 프로이드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큰 오산이다. 도리어 이 책을 읽음으로 루시언 프로이드를 좋아하는 현대 미술가의 목록에서 지우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의 인품이나 성격과 그의 작품을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안다. 가끔 어느 전시회에서 어떤 작품을 보고 난 다음, 그 예술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끼곤 한다. 그 예술가가 실은 성격 파탄자이거나 상대방의 상황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바람둥이이며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술가에 대한 끝없는 찬사를 늘어놓았던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할 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도덕성, 인품 등과 그의 예술 작품을 연결 지으면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측면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준비된 독자를 위한 것이다. 아니면 루시언 프로이드의 강력한 팬이거나 진지한 현대 미술 애호가이거나.
나는 루시언 프로이드의 사생활을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면 20세기 후반 추상미술과 미니멀리즘과 설치미술이 주된 경향이었던 시기, 유례없이 독특하고도 풍부한 구상 작품을 선보인 프로이드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건 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 대부분은 누구와 만나 연애를 하고 헤어졌으며, 또 다른 누구를 만나 어떻게 했는지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루시언의 매력에 빠져 들었으며, 스스로 상처입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옆에 머물러 있었다고 강조한다. 루시언 프로이드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씌여진 책이라기 보다는 이런 문제적 개인도 흥미롭게도 성공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듯 읽혔다.
현재 영국 인디펜던트지의 편집장이기도 한 조디 그레이그Geordie Greig는 말년의 루시언 프로이드를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책을 쓰게 된다. 어쩌면 예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간 루시언 프로이드를 알려주고 싶었을 듯 싶다.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불쾌함을 선사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열네살이었던 애니 프로이드는 아버지의 모델이 된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십 대의 딸을 누드모델로 쓰는 것은 분명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것은 애니의 인생에서 몹시 중차대한 일이었으며, 논쟁의 여지가 많은 사건이었다.'(275쪽)
"나는 동물로서 사람에 정말로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들을 벗은 모습으로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한층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과 때로는 머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그 형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드러난 피부를 통해 그 사람의 기질과 성질, 혈관과 점들까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루시언 프로이드, 279쪽
<금발의 여인>(1980~85), <천 옆에 선 여인>(1988~89), <천 옆에 누운 여인>(1989~90)은 소피를 모델로 한 세 점의 초상화다. 소피는 루시언의 작업실에 갇힌 포로였지만 그의 존재에 압도되어 스스로 거기에 있기로 선택한 사람이었다.이 세 점의 초상화 중 마지막 작품은 소피에 대한 루시언의 승리를 보여주는 작품이었으며 그의 가장 강렬한 누드 초상화에 속했다. 소피는 루시언이 붓을 닦는 천 옆에 불편하게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누워있다. 사뮈엘 베케트가 배우들을 쓰레기통에 묻어버리거나 아니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노려보면서 반복적인 대사로 리듬을 타며 인간의 조건에 대한 위대한 진실을 드러나게 했듯이, 루시언은 그의 모델들이 작업실이라는 작은 무대를 잡아 늘려 더욱 넓은 이해의 세계가 되도록 했다. (2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