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헬레나 로젠블랫(지음), 김승진(옮김), 니케북스
1.
독서모임 '빡센'에서 선정해 읽은 책이다. 독서모임을 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들과 관련없는 책이 선정되고 강제적으로 읽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읽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유감스럽게도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를 영어로 옮기면 리버럴리즘(liberalism)이며, 미국에서 리버럴은 진보 성향을 의미하는데, 하이에크가 '리버럴'인가 하는 의문을 이어졌다. 그런데 한국에선 '자유주의'라고 하면 보수 우파를 연상시킨다. 가령 '자유총연맹'같은 조직을 떠올리게 한다고 할까. 도대체 '자유주의'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이 책이 선정되었고 이번에 읽었다. (메이너드 케인스에겐 리버럴이 어울리지만, 하이에크는 확실히 보수적인데 말이다.)
2.
한 달 이상 꼼꼼히 읽었고 책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진보적인 이들도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고, 보수적인 이들도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이 신기한 상황 속에서 도대체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한 눈에 조망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할 때, 그 유래가 근대 세계의 '자유주의' 였음을 아는 이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의 말대로, '단어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다'(10쪽)
이 책은 지성사 책에 가깝다. 일종의 개념사이며, 자유주의라는 단어의 역사, 개념의 유래, 변천을 따지고 물으며 현대적 의미를 되새긴다. 그런데 나는 정치사 책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보수화되는, 혹은 극우화되는 대중들', '자국 중심주의 속에서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정치 지도자들', '기존 강대국인 미국와 EU의 약화', '지정학적 위기, 또는 대결 구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레바논과의 전투' 등 정치적 혼란이 가속화되며 언제 끝날지 예측이 어려울 지경이다. 이런 와중에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해 전 랑시에르의 책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에 닥힌 어떤 위기를 직감했지만, 나는 랑시에르의 너무 조심스러운 접근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라고 여긴다. 이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헬레나 로젠블랫은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주장하던 정치사상가나 지도자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실제 정치 흐름과 대중의 판단이 어떻게 다른가를 언급한다. 실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한 나라의 리더가 독재를 펼치는 모습이 19세기, 20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졌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현대 자유주의의 탄생지라고 여겨지는 미국에서조차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자유주의(리버럴리즘)라는 단어는 시대별, 지역별로 그 이해가 다르다. 따라서 지금도 미국에서 이야기할 때나 한국에서 이야기할 때, EU 국가들에게 받아들일 때 그 의미가 다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자유주의라는 단어의 쓰임새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프랑스 등의 유럽에서는 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옹호한다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반면, 미국에서는 큰 정부를 옹호한다는 의미로 쓰인다.(13쪽)
하지만 '리버럴'이라고 말할 때 상당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고귀함을 의미하였으며 배려심과 사려깊음, 또한 공감이나 자선 같이 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단어였다.
거의 2000년 동안 '리버럴'이라는 단어는 지배층이 갖춰야 할 고귀한 덕목을 묘사하는 말로 쓰였다. 로마 시대에는 공화국의 시민,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귀족의 특질을 지칭했다. (...) 리버럴함을 갖추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귀족의 의무]의 일종이었고, 리버럴리티의 실천은 세습 신분제에 기반한 사회, 정치 질서를 지탱하는 것이기도 했다. (72쪽)
중세의 리버럴리티에는 사랑, [고통에의] 공감, 특히 자선과 같은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결합되었고 이러한 가치들은 공화정만이 아니라 군주정에도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신은 자비를 베푸실 때 '리버럴'하시며 예수도 사랑을 베푸실 때 '리버럴'하셨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베풀고 사랑을 나눔으로써 신을 볻받아야 했다. (28쪽)
심지어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도리어 의무를 강조하며 공동체와 사회과 국가에 희생하는 어떤 태도를 의미하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이 권리를 갖는 것은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활발히 잘 돌아가는 공동체가 이기심의 추구에만 기초해서 구성될 수 있다는 견해를 언제나 거부했고 이기주의의 위험에 대해서는 끝없이 경고했다. (15쪽)
4.
우리가 이해하는 바 자유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기댄 바가 크다. 그러나 이를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바 자유주의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저 어떤 기본적인 원칙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할까. 기존에 귀족이나 시민이 가져야 하는 덕목을 뜻했던 단어가 어떤 정치적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1789년 대혁명의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였다. (141쪽)
그러나 실제 대중들에게 자유주의적 이념이나 가치가 전파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 당시 독일의 한 자유주의자가 표현한 바를 빌리면, '진정한 다수'는 단순히 사람 수가 다수라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었다(141쪽). 도리어 일반 대중이 보기엔 왕정을 옹호하는 귀족이나 성직자나 의회와 보통선거를 주장하던 자유주의자들은 동일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지지한다는 말은 보편 참정권[보통선거]을 지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통선거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데는 공포정치와 나폴레옹 체제의 경험이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 1792년에 보통선거로 국민공회가 구성되었는데 바로 이 국민 공회가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독재도 국민투표로 승인을 받았다. 보통선거는 한편으로는 폭민정치, 폭력, 무질서를, 다른 한편으로는 잘 속아 넘어가고 판단력이 부족하고 굴종적인 대중의 속성을 종종 연상시켰다. (127쪽)
혁명의 두 번째 국면에서 공포정치를 목격한 지라 이들은 프랑스 사람 대다수가 정치적 권리의 주체가 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정치 세력화된 군중은 불합리하고 규율없고 폭력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85쪽)
결국 보통선거(실제 투표하는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성인 남성에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로 제한되었다. 프랑스나 영국에서도 고작 수십만명 수준이었다)를 통해 선출된 이들이 도리어 자유주의적 정책이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하기도 하고 독재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를 통해 점점 더 권위주의 체제로 변해가는 나폴레옹의 통치에 가톨릭 교회가 지지 세력이자 사실상의 연합 세력이 되었다. (85쪽)
역사적으로 19세기 유럽는 급격하게 세속화된 시기로 이해되는데, 나는 이를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나 마르크스 엥겔스의 경제학, 니체나 프로이트의 사상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 뿐만 아니라 정치적 변화(왕정에서 의회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와중에서 카톨릭 교회가 왕정을 지지했다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싶었다.
5.
이 책은 자유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참 쉽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회주의 또한 자유주의적 경향 속에서 발아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싸운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권위적인 왕당파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정치 지도자의 독재였다.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를 체포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큰아버지의 헌법을 모범으로 삼는 새 헌법을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기존 법의 효력을 정지하고 계엄령을 발동했다. 수천 명이 투옥되거나 식민지의 유형지로 보내졌고 또 다른 수천 명이 망명을 해야 했다. 1년 뒤, 자신의 쿠데타 1주년 기념일인 1852년 12월 2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되었다.
큰 아버지의 선례를 따라 루이 나폴레옹도 유사 민주주의 정권을 만들었다. 콩스탕과 토크빌이 경고한 최악의 악몽이 현실화된 것같았다. 독재가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오는 것 말이다. 새 헌법은 국민주권에 기초했고 대의제 정부를 표방했지만 나폴레옹에게 과거 그 누가 가졌던 것보다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다. (201쪽)
그러나 나무위키의 나폴레옹 3세 항목을 살펴보면 정치를 잘 했다고 언급될 정도다. 이런 연유로 인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지도자가 독재를 할 때를 카이사르주의라고 말하게 되었다. 한국의 여러 대통령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카이사르주의는 민주적 독재의 새로운 형태를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키고도 민중의 의지를 구현하고 있노라 자처하는 형태말이다. 카이사르주의 대신 '나폴레옹주의'나 '보나파르트주의' 같은 용어가 쓰이기도 했고, 카이사르주의가 꼭 비판적으로 쓰인 것도 아니었다. (232쪽)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공교육에서 나폴레옹 1세나 비스마르크 수상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방식이 아닌가 생각했다. 특히 비스마르크 수상의 통치 방식은 결론적으로 히틀러를 불러온 것이니 말이다.
막스 베버도 의회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던 지도자 비스마르크에게 상당히 큰 책임을 돌렸다. 그에 따르면 카이사르주의적인 독재자 비스마르크는 정당들을 분쇄했고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든 몰아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전 선동을 사용했다. 1918년에 베버는 비스마르크가 남긴 유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다소 길지만 전체를 인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비스마르크는 정치적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국가를 남겨놓았다. ...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정치를 하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의 나라를 남겨놓았다. ... 독일은 [통치자가] '군주적 정부'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대신해 결정해버리는 것에 대해 그게 어떤 결정이든 숙명적으로 참고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비스마르크는 후세에 "어떤 정치적 유려함도 없는 나라", "자신의 정치적 의지가 없는 나라"를 남겨놓았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추구하는 비자유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조작된 가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비스마르크는 "이기심이야말로 규모가 큰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건전한 토대"라고 말했다. (277쪽 ~ 278쪽)
6.
19세기 조선은 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많던 반란들 중에서 목숨을 잃은 정부 관리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심지어 포박했다가 임금에게 가서 백성들의 처지를 알려달라고 하며 풀어줄 정도였다. 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일반 백성들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바보들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러다가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야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할까. 이 때가 되어서야 계몽 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른 말로 근대적 정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여기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공이 크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부당한 사회 체제가 원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1848년의 실패가 대중의 도덕성이 처참하게 붕괴해서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도덕성이 무너진 탓에 소수의 선동가가 사회주의 개념을 주입해 대중을 오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1848년 혁명이 "인간 정신의 일반적인 병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상한" 사회주의 이론에 위험하게 경도되어 생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이란 지적 역량과 도덕적 특질이 부족해서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보았다. 대중은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상, 가령 사회주의 같은 철학으로 빠지기 쉬웠다. 1848년 혁명은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말한 바를 입증하는 듯했다. 프랑스 민중에게는 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한 사상과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이다. (207쪽 ~ 208쪽)
서구도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로서의 자유주의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대중의 교육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본격화되었다.
밀이 혁명에서 얻은 주요 교훈 하나는 어떤 새로운 사회주의 개념도 공동체의 정신이 먼저 달라지지 않으면 성공할 기회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인류의 "지적, 도덕적 상태가 진정으로 길들여지는 것"이 꼭 필요했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더 평등한 결혼 제도였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의 윤리와 정치"를 가르칠 수 있는 자유주의적 교육이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정신을 바꾸려면 종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구원에만 사고가 고착되도록 해서 사람들을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감을 잃고 이기적이 되게 만들었다. 밀은 "공공선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함양해줄 수 있는 "인류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21쪽)
프랑스의 새 학교 시스템은 두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마련될 터였다. 첫째는 자유로운 사고와 토론을 독려함으로써 소년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고, 둘째는 뷔송이 "자유주의적 원칙"이라고 부른 것을 불어넣음으로써 소년들이 자신을 통제하면서 스스로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자기 통치"라고 불렀는데, 좋은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를 통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 여러 차례 강조되었다. 이것은 카톨릭 사제와 그리스도교의 도그마에서 아이들의 해방시키고 그 대신 자유주의적 혹은 일반화된 그리스도교의 도덕 원칙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했다.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경우에는 [종교 경전으로서가 아니라] 도덕을 알려주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서로만 다루어야 했다. (292쪽)
또한 반자유주의적이었던 카톨릭 교회의 대안이 필요했다. 기존 카톨릭 교회의 체제를 거부하며 새로운 형태의 종교- 자유주의에 우호적인 - 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으며, 이 자리에 프리메이슨이 떠오른다.
또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이 인류교를 가르칠 또 다른 종교가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에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 로지에 들어갔다. 로지에서 그들이 한 연설을 보면, 내면의 미덕과 고결함을 함양한다는 목적을 볼 수 있다. 프리메이슨의 목적은 "도덕적인 빌둥"이었다. 프리메이슨 로지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규율하는 법을 배우고 "진정한 남성다움"을 획득하게 될 것이었다. 블룬칠리는 프리메이슨 로지를 "인류의 학교"라고 불렀다. 프리메이슨은 "고귀한 도덕을 가르치는" 인류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가톨릭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1840년대에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등지의 프리메이슨 로지가 유대인을 받아들였고 곧 모든 곳의 프리메이슨 로지들이 이를 따랐다. (224쪽)
그러나 이러한 모색이나 활동이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 도리어 왕정은 이제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근대적 군대의 등장이나 사회 보장 시스템의 필요성 등 자연스럽게 자유주의는 일종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7.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 자유주의는 20세기 초반부터 논의되었다.
19세기말에는 정부의 역할과 관련해 두 개의 자유주의가 존재했다. 새로운 자유주의와 옛 자유주의, 혹은 개입주의와 자유방임주의였다. 그리고 둘 다 자신이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주장했다. (345쪽)
듀이에 따르면 자유주의에는 "두 개의 조류"가 있었다. 하나는 인도주의적 조류로, 정부개입과 사회적 입법에 열려 있는 자유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자유방임을 주창하는 조류로, 거래 산업, 은행, 상업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였다. 그는 미국의 자유주의는 과거에도 지금도 자유방임과는 전혀 다르다고 언급했다.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 복음"을 설파하는 것과도 관련이 없었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자유와 너그러움, 특히 정신과 성품에 관련된 개념"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더 높은 평등을 촉진하고 정부의 힘을 빌려 금권 정치에 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였다. (369쪽)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로부터 20세기 거대한 정치 실험으로서의 사회주의가 떨어나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적 흐름들 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자신이 세운 자유주의 정부로부터 모욕과 배신을 당하고 법으로 결사의 자유를 금지당한 노동자들은 비밀리에 모이기 시작했고 신문도 창간했다. (...) 이 당시에는 자유주의적이라는 것과 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이 꼭 상충하지는 않았다. (154쪽)
또한 자유방임이나 국가(정부)의 개입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또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이 사회주의화(마르크스주의화)된다는 생각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미국은 매카시즘으로 많은 문제가 생겼고, 한국은 아직도 아무 쓸모도 없는 이념논쟁으로 몰고 가려는 이들이 떼로 움직이며 정치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요컨대 영국, 프랑스, 독일 모두에서 19세기 자유주의자 다수는 정부의 개입을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재산권이 절대적으로 수호되어야 하는 권리라는 개념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169쪽)
8.
책을 읽은 지 한 달 정도 지난 것같은데, 이제서야 리뷰라고 하기엔 다소 두서없는 글을 올린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현대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유주의라는 단어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 이상의 어떤 것을 읽고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왜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는지, 여기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투표 한 번 잘못한 것으로 한국은 전체적으로 엉망이 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더욱 더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세상사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가지길 원하고 정치나 도덕, 행동에 대한 일관성을 가지길 희망한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법의 적용 잣대로 정치적 신분이나 경제력, 이런 저런 배경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뜻한다면, 과연 지금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가 맞는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이 정도까지 성숙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그런데 다시 퇴행하고 있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솔직히 일반 시민들은 잘 모르고, 그다지 관심없고, 앞으로도 관심없을 듯 싶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작된다. 아니 어쩌면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세계는 이미 저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