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하련 2024. 11. 9. 11:53

 

 

 

 

 

 

마지막 외출 -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액자 소설이지만, 그 액자는 단단하지 않고 그 안은 너무 진지했다. 사랑 이야기지만, 과연 사랑이야기일까. 늘 그렇듯 사랑은 기만적이다. 그건 일종의 허위인 탓에, 치명적으로 쾌락적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의 떨림과 흥분으로, 중반 이후부턴 기만적인 믿음과 소유욕으로 가득찬 육체의 쾌락으로 이어지다가 차갑게 식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과 육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 식어버린 마음과 그 가라앉음을 견디지 못해 헤어진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고 슬픈 이별로 포장하는 탓에, 세상에는 사랑 노래로 흘러넘친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메타픽션이면서 사랑의 기만성을 드러내는 액자이며 사랑을 갈구하나 끝내 사랑을 알지 못한 채 파국을 향해가는 어떤 이들을 위한 엘레지(elegy)다. 어쩌면 현대의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파국 상태일 지도.

 

"현대철학의 심미적 반영이 현대예술이야. 모든 시대의 예술이 당시의 이념 위에 기초하듯이 현대예술도 현대의 세계관 위에 기초하지.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몬드리안, 리히텐슈타인, 워홀 등의 미술가가 현대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예술가들이야. 음악 쪽에는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존 케이지, 스티브 라이히 등이 있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심미적 표현이 이들의 예술이야."(93쪽)

 

거칠게 말해 양식들 대부분은 어떤 이념들의 반영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보잘 것 없는 양식들 - 말투, 몸짓, 눈빛, 걸음걸이, 손가락 끝, 혀 끝, 그리고 껴안음까지도 어떤 세계관, 이념의 대응이다. 그것은 잔잔한 호수 위로 지나간 짧은 바람이 남기고 간 물결같은 것. 당대의 이념도 변하듯, 양식도 변한다. 심지어 예술사에서의 정의하는 양식보다도 더 빨리 사랑은 변하고 식고 잊혀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랑은 스쳐지나감이든지 그냥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소일거리이거나, 결국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원칙을 준수했다. 섹스는 분명한 것이지만 사랑은 침묵 속에서 지나쳐야 할 것이라는 그의 원칙. 그것은 신비에 속한다는 것이라는 원칙. 둘을 섞어 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원칙. 나는 몰랐다. 그를 묶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켜봄에 의해서만 세계가 온전히 지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육체는 단지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만나주고 많은 것을 말해준 것은 이미 충분한 사랑이 아니었는가? 다른 어떤 사랑은 소유욕이 아닌가? 책임과 물질적 증표를 요구하는 나는 탐욕으로 하나의 세계를 망치기 시작한다. (96쪽) 

 

하지만 문명은 존속을 위해서 있고 인간은 대를 잇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포장된 무수한 기만적 양식들은 결국 인간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발전해온 진화의 산물이다. 그 진화는 분명 놀라운 것지만, 과연 순수하게 내 의지라든가, 내 바람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는 걸까.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곳에는 이미 사랑이 없다. 이미 지나갔고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생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의 희망이 없다고 절망이 왔다고 말하지 말자. 사랑이 언제 우리에게 희망이 되었다고 하는가. 사랑이 우리에게 희망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우리가 편의상, 본성상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소설은 돌고 돌아 읽는 이들의 마음을 향한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구석진 방에 혼자 슬퍼하고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기 자신이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기 자신이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새로운 구원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현대란 그런 시대다. 아비로부터 받은 유산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이 드러난 시대다. 그리고 그 쓸모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싸운 시대다. 가진 게 없으니, 자유롭게 떠나자. 사랑이 없다고 아파하지 말자.   

 

이제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음악을 듣자. 조금 울적한 마음이 살짝 올라갈 지도 모른다. 현대음악은 대체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