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사랑?, 훗~!

지하련 1998. 9. 15. 23:47


        날씨가 너무 좋아 집  안에서 빈둥거리기로 마음 먹었다.  몇
     달만에 Sidsel Endresen을 꺼내 듣는다.
       
        "So I write/about the world/and only rarely come close/to
     saying this/so we  can share  this/it's just black  marks/on
     white  paper/and  me/wanting   another blank   page/and  yet
     another/so I write/thinking I'm constructing a  bridge/but I
     get lost/on the  way across/and  I stumble/on  implications/
     associations/ synonyms/combinations/of the perfect  words/so
     I write/and I get lost/in black marks/on the white paper/and
     still/it is this/this......"
        (* So I Write라는 노래의 가사)
       
                         *                     *
       
        날씨가 너무 좋아 집에서  빈둥거리다니, 내 생에 이런  날이
     있으리라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이런 날에 아리따운  처자와 덕
     수궁 돌담길이나 걸어야 하거늘, 오늘 난 습기 먹은 음반들을 꺼
     내 조심스럽게 닦곤 음악을 듣고  있다니! 젠장, 왜 이리도  '사
     랑'을 노래한 음악은 많은 것인가!
       
                         *                    *
       
        용산 데이콤 앞에서 버스를 탄 허름하고 초췌한  차림의 중년
     사내는 버스가 한강대교 중간  지점까지 갈 때까지 동전을  찾지
     못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앞좌석에 앉아 있던,  정확히 말
     해 버스 운전석 바로 뒷 좌석, 그 중년의, 깔끔한 외출복에 연한
     화장을 한 여인이 핸드백에서  토권 하나를 꺼내 중년  사내에게
     건네준다. 그 때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그것을 받고
     황급히 시선을 거두곤 버스 뒤로 들어갔다. 버스는  한강대교 끄
     트머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렸고, 토권은 운전석 옆  네모난 공
     간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좌석에 앉은  그 중
     년의 여인은 연신 뒤를 쳐다보았고,  그 중년 사내는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정거장 가지 않곤  그
     사내는 무언가에 쫓기듯 버스에서 내렸다. 잠시 후  여인은 핸드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가끔 젊은 한때  맹렬하게 사랑했던 이를, 그러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이를 아주 우연스럽게 만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이나 지금 같이 지내고 있는 이를 사랑하지 않음이 느끼는  순간
     마다 떠오르는 사람을 아주 우연히 스치기도 하는 법이다.
       
        이 세상엔 무수한 사랑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에는  남자와 남
     자와의 사랑, 여자와 여자와의 사랑, 섹스로만 연결된  사랑, 고
     등학생과 중년 사내나, 중년의 여자 사이의 사랑도 있을 수 있으
     며, 한 사람은 때리고 한 사람은 맞으며, 그러면서  사랑을 확인
     하는 관계도 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를 결론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자신 밖에 없다. 그것을 사랑이 지나간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더라도.
       
                        *                      *
       
        난 '사랑'이라고 표현된 것들을 믿지 않는다. 왜냐면, '사랑'
     만큼 사람 뒷통수 잘 때리는 것도 드물기 때문에. 여하튼 오늘은
     너무 날씨가 좋다. 이런 날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앞으로  계속 빈둥거릴
     것같다. 오! 가엾은 내 젊은 날이여. 오! 투명한 초가을의 내 생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