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계절과 계절 사이

지하련 1998. 9. 1. 23:50


01.
가을이 오면 그대 울게 되리, 가을이 오면 그대 옷자락 끝을 붙잡고 바람 속에 둥지를 틀리, 가을이 오면 그대 눈물 얼어 심장이 되고 그대 눈동자 갈색으로 늙어 빛바랜 훈장이 되리, 그대 향한 이 마음 주춤거리는 사이, 아,  가을은 무섭게 내 가슴 도려내리니, 손가락 자르고, 발가락 자르고, 그대 위해 글을 쓰지도, 그대 향해 걸어가지도 못하게 하여, 그대 향한 이 마음 식히리라.
          
02.
오랫만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순간들이 모여있는 곳이 계절과 계절 사이이다. 
          
이틀 전엔 밤을 세워 공부를  했고, 어젠 새벽 한  시까지 도서관에 있었다. 보통 일어나는 시간이 오전 11시쯤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처음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회의에 사로잡히곤 한다. 나로  하여금 공부를 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자존심'이다. 이건  일종의 나르시즘이기도 하다. 가끔 새벽 잠을 청할 때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순간 날 지탱하는 것도 '자존심'이다. 
          
자본주의 속으로 들어가느냐,  자본주의 속으로  들어가지 않느냐의 갈림길에서 난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선택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나혼자만의  선택일 뿐, 우리  부모님이나 동생들, 혹은 내가 나중에 만나게 될 내 가족들을  위한 선택은 아니다. 이미 선택은 끝났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갑이 얼마 남지  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연 내 선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윤 뭘까.
          
03.
9/20 <댓스 댄싱>. 잭 하레이  1985
10/18 <태양은 외로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1/15 <메트로 폴리스>. 프리츠 랑 1926
12/20 <베니스에서의 죽음>. 루치노 비스콘티 1971
           
위의 영화 상영 목록은  환기미술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이달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들이다. 입장료는 5천원. 집이 미술관 옆이면서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한 번  가야 겠 다. 그런데, 잭 하레이는 어떤 놈이지? 
           
04.
오에 겐자부로의 『동시대게임』을 다 읽었다.  작년 12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몇 달이 걸린 셈인가! "오에의 작품세계는 고향 숲속 마을, 갇힘, 성, 핵, 반전, 장애자, 공생, 공포, 절규, 환상, 우주, 미래, 인류, 재생, 구제 등 다양한 주제를 추구해 왔고, 문체는 특이하며  난해하다"라는 편집위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다음 읽을 오에의 소설을 골라본다. 
          
지금 새로 손에 잡은 소설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이다. 지금 레이몬드 카버의 영문소설은  교보문고에 가면 구할  수 있다. 내가 잡은 건 번역본이다. 영문으로 구하고 싶은 건 도널드 바셀미와 리차드 브라우티건이다. 
          
05.
언젠가 스터디 때  '일본은 동네동네마다 틀리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한국은 박통의 근대화로 인해  동네동네, 도시도시가 똑같다고 의견이 수렴되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엔 그냥 넘어갔지만,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 듯하다. 왜냐면, 일본이  단일국가체제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얼마나  많은 소부족들이 있었는가.  하지만, 한국이 단일국가체제로 지내온 것은 천년이 넘었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일본은  동네동네마다 틀리고, 한국은  왜 동네동네가 똑같은가'에 대한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