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데이비드 하비

지하련 2007. 5. 30. 16:43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서울에서 딱 일주일만 살면서 매일 아침 일간지를 챙겨 읽으며, 출근길 지하철, 퇴근길 버스를 타보자. 어떤 기분이 들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에 대해선 숙고할 틈도 없이, 생각하는 것을 꼭 죄악이라는 듯 여기며, 현재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진 않을까. 하긴 그렇게 채찍질해서 현대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승승장구하며 살아남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으니(아니, 많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살아야된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왜 이렇게 되었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예술과 미학에 경도된 채, 실존주의적 체념을 가슴 한 곳에 묻고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무심하게 흔들리는 나에게, 데이비드 하비는 주옥같은 인용들과 함께, 혼돈스러운 현재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꼿꼿하게 서있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은 아직도 유효하다!

테리 이글턴의 ‘압도적이다!’라는 찬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본질을 드러내며, 그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와 문화와 예술, 미학, 그리고 일상생활,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엄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는다(1970년대 이후). 가령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뉴욕 주식 시장이 곧바로 한국 증시에 영향을 주는 것’ 따위는 불과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즉 이는 원래 당연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적용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여러 현상들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향해가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의 ‘시공간 압축’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다는 것에 강조점이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빨리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러한 속도로 인해 우리 인간의 인식 및 삶의 유형을 예상치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에 강조점이 찍혀져야 된다(시공간 압축은 새로운 개념이라기 보다는 고대 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에 가깝다). 사회학자인 그가 문화예술과 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의 변화로서의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이 체제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변화. 그러면서 그는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분석해낸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듯이, 우리 인간도 과거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현재와 미래만을 바라볼 뿐이다. 최근의 급속한 기술 발달은 과거는 지나간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 이미 폐기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압도적 현재와 미래를 만들고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폐기되고 지나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찾지 않는다. 그런데 하비는 그 속에서 현재의 우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나는 딱 한 번 이 책을 추천받았다. 꽤나 많은 인문잡지를 읽었고 많은 지식인들을 만났지만 말이다. 한국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내가 읽은 몇 권 되지 않는 책들 중에서, 마샬 버먼의 책 ‘현대성의 경험’ 이후로 좌파적 시각에서 현대를 통찰력 있게 분석해 낸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은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필독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