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아롬미디어 |
에라스무스 -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승리와 비극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하나의 세계관이 여기 있다. 하지만 이 세계관은 사람을 유혹하지도 선동하지도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을 내뿜지도 않는다. 언제나 차갑고 건조하다. 늘 조용하고 방관자의 시선을 가진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문제를 지적해내어 보는 이를 찬탄케 만들지만 곧바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는 그런 세계관이다. 그래서인지 이 세계관은 다른 편에 서서 보면 늘 우유부단하며 지나치게 신중하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더구나 언제나 교육의 중요함을 설파하며 교양을 강조하고 문명화된 인간을 요구한다.
“현재의 제 모습, 저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은 오로지 당신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Salve itaque etiam atque etiam, pater amantissime, pater decusque patreiae, litterarum assertor, veritatis propugnator invictissime.(안부 올립니다, 다시 한번 안부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조국의 명예, 예술의 수호신이여.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실의 투사시여.)”
젊은 프랑수아 라블레는 늙어가고 지쳐가는 에라스무스를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교육과 웅변(eruditio et eloquentia)의 시대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 끝에 나온 언어를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들이 듣는 유일한 언어는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언어인 시대, 이제 사고한다는 것은 패거리들의 망상이 돼버렸고 루터식 아니면 교황식으로 획일화되고 학자들도 품위 있는 편지나 소책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바닥 아낙네들이 하는 식으로 거칠고 저급한 욕지거리를 서로 퍼부어대는 시대’에 젊은 라블레는 고백을 한다.
흔히 인문주의로 번역하는 Humanism의 역사는 서구 근대의 역사이지만, 늘 미완의 역사로만 그친다. 하지만 ‘실현되는 않는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는다’고 츠바이크가 서술하고 있듯이 무릇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와 지식인들에게 인문주의의 이상은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막 시작하는 히틀러의 독일 속에서 에라스무스의 삶을 뒤새기면서 광신을 멀리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문주의의 이상과 염원을 갈구하고 있다.
“언제가는 지쳐 사라지는 것이 모든 격정의 성향임을. 스스로 지쳐버리는 것이 모든 광신의 운명임을. 영원한 것, 조용히 인내하는 것, 즉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뎌낼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열정과 광신의 시대 속에서 츠바이크는 사람들에게 에라스무스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게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 이 대단한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사람으로서,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살아가다보면 패배하게 될 줄 알면서도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이상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지켜내어야만 하는 인문주의 이상 말이다.
*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브로노프스키, 매즐리슈,(<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엄 L. 랭어 엮음, 푸른 역사, 388쪽)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