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쿠르베
"어떤 세기의 화가가 그 이전 세기나 미래의 세기의 사물을 재현한다는 것, 즉 달리 말해서 과거나 미래를 그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역사적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대적인 것이다. ... 또한 나는 회화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며, '현실적이고 실재하는' 사물들의 재현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란, 어떠한 단어 대신에 모든 가시적인 대상으로서 구성된, 전적으로 물질적인 언어이다. '추상적인' 대상,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실재하지 않는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 쿠르베,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1861년 12월) 중에서
- 쿠르베,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1861년 12월) 중에서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오랜만에 미술에 대해서 잠시 끄적여 본다. 로만티시즘(낭만주의)의 로만은 로마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로망스(romans)'에 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 부인과 기사의 사랑 따위나 요정과 마녀 같은 것들은 이 로만티시즘 시대(19세기 초반)에 부흥한 것도 이와 연관이 깊다. 요정과 마녀가 중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유는 이 서양의 전설은 기독교적이거나 그리스-로마적인 전통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적-북유럽적이며 중세적 전통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역사 속으로 북유럽 게르만이 자신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중세가 시작될 무렵이며 7-8세기 이후에는 그들의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르네상스)로 인해 이것이 다소 위축되다가 로만티시즘 시대에 와서 다시 불꽃을 피우게 된다. 북유럽 신화와 전통에 기대어 있는 '반지의 제왕' 같은 소설도 이러한 로만티시즘의 끝자락에 위치한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것들이 유행의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지성인들이 서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서구 역사 상 최초다. 18세기가 인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지식인이 정치적 권력을 얻었으며, 이는 종교나 왕권, 혹은 군대에 기대어 이룬 것이 아니라 대중과 저널리즘(* 인쇄술이 얼마나 지대한 공로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에 기댄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은 '이성'일지 모르나, 그 귀결은 '광기'요, '파시즘'이었다. 결국 유럽은 '합리적 이성'이 현실 정치 상황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끝없는 절망감 속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낭만주의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흔히 '낭만적'이라고 할 때의 그 기분이 현실 앞에서 서서 현실에 대응하며 그것과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곳에 위치한 것도 바로 이 까닭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은 그 절망, 무력감, 광기와 싸우며 그것들을 보여준다. 들라크루와는 싸우는 낭만주의자였으며, 제리코는 보여주는 낭만주의자였다. 이러한 낭만주의자들 속에서 쿠르베는 낭만주의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된다. 즉 신화적 현실 세계(들라크루와)도 아니며, 미쳐버린 현실 세계(제리코)도 아닌, 그냥 너무 평범해서 아무런 가치 판단도 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경향을 '레알리즘'이라고 이름붙인다.

캔버스에 유채, 135*200cm
1866년, 프티-팔레 미술관, 뉴욕

캔버스에 유채, 55*89cm
1872년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쿠르베의 '잠'은 사교계나 귀족 고객들의 취향을 고려해 그린 작품이다. 그의 표현력은 당대 최고였기 때문에,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예술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래 작품 '송어'를 보라. 뭐라고 하기에 다소 난감한 소재의 작품이다.
(미술고교에 다니는 학생이 이런 작품을 그린다면 바로 미술담당 교사에게 핀잔을 듣거나 야단을 맞겠지. 나도 초등학교 때 이런 유형의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상식 이하의) 지적이었는데.)
'송어'를 보면 쿠르베가 얼마나 정치적인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적절히 당시 지식인들과 미술계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 방법을 곧잘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 낭만주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였으며, 아카데미 미술과 낭만주의 미술에 파묻혀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식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쿠르베는 낭만주의 시대를 끝내고 근대 예술의 최절정인 인상주의 시대를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쿠르베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면, 마네는 그 현실을 사각의 캔버스에 옮기는 방법에 있어서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다시 한 번 위 쿠르베의 편지를 읽어보자. 그리고 아래 그림을 한 번 보자. 1890년에 그려진 이 그림. 많은 웹사이트와 미술 관련 책에 등장하는 이 그림. 그런데 정작 권위 있는 미술사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 뭐, 이야기 해 봤자, 비난 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 이 쯤에서 그치는 것이 좋을 것같다. 더구나 이 그림을 대단한 그림인 양, 이야기해대는 무수한 웹사이트의 글쓴이들과 미술 관련 서적에 이 그림을 가지고 뭐라고 해댄 저자들이 솔직히 두렵기도 하니깐.

위 작품이 제작되기 70년 전에 그려진 아래 그림을 보자. 아리 세페르와 장 레옹 제롬이 뭐가 틀리지? 놀랍게도 세상은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놀라운 일이. 예술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소리 따위는 집어치워야 된다.

아리 세페르(Ary Scheffer)에 대해 보들레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보들레르는 들라로쉬(Delaroche)를 생각나게 하는 '그토록 불행하고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막연하며 그토록 더럽기 짝이 없는' 셰페르의 그림에 대해 조소한다.
- A. 리샤르, '미술 비평의 역사', p.113
- A. 리샤르, '미술 비평의 역사', p.113
아, 이 글에서 들라로쉬까지 이야기하진 말자. 다만 인상주의 미술가들과 제롬, 아리 세페르, 들라로쉬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동격에 놓고 설명하는 글이나 책이 있다면, 그 책은 형편없는 쓰레기임을 기억해두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