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예술사

귀도 레니(Guido Reni)의 성 세바스찬(St. Sebastian)

지하련 2007. 9. 30. 13:36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갑자기 찾아든 가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육체와 영혼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진정시키란 구름이 가뜩 끼어있는 서울 하늘에서 별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어려운 종류의 일이었다. 갑작스런 계절의 변화는 자주 격렬한 심리적 불안과 섬세하고 민감한 우울을 동반한다.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초월적 실체, 또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시대는 니체와 프로이드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의 니체만큼 신을 갈구했던 이도 없었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아예 영혼의 신비를 없애버렸으며, 젊은 루카치는 심리학의 발달을 비난했다. 하지만 ‘종교는 아편’이라며 공격했던 마르크스는 종종 나에게 그만큼 종교적인 사람도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끔 한다.

하지만 종교와 함께 살면서 신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초월적 세계와 현세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눈만 감으면 천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런 세계. 그런데 과연 그런 세계는 존재했던 것일까. 종종 우리가 중세에 대해서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19세기 초의 낭만주의자들은 이를 열정적으로 믿었다), 현대의 많은 중세 연구는 그런 느낌의 허황됨을 보여주고 말았다.

세속의 세계에 살면서 초월적 세계에 대한 염원은 인류에게 문명이라는 것이 생기는 시대부터 현재에까지 지속된, 우리 문명의 본질적인 태도 중의 하나다. 그것은 세상과 마주하면서 느끼는 끝없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강력한 방패다. 그리고 그 방패의 결정체는 종교인 셈이다. 그 속에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기독교의 역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순교의 역사라는 점을 보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순교는 서양 미술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그것은 신앙심의 표본이며 절정이고 인간이 신성에 가장 가까이 가는 순간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순교의 순간을 그렸고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 1643)는 순교의 순간을 창백한 우아함으로 그려낸다. 조용하고 진지하게, 하지만 캔버스 바깥 어딘가를 향해 뜬 두 눈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보이지 않은 신을 향해 갈구하는 눈빛은 귀도 레니의 작품에 빠뜨릴 수 없는 지점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19세기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은 그를 경멸하고 비난했다. 18세기 사람들이 귀도 레니에 열광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하긴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주의는 때로 너무 기형적이었다. 1575년 볼로냐에서 태어난 귀도 레니는 9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20살 때는 카라치의 화실에 나갔고, 안니발 카라치(Annibale Carracci)가 세상을 떴을 때 그 화실의 수장이 되었다. 그에게 스물 중반의 로마 여행이 그의 예술 세계를 결정지은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주로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소재/주제에 많은 노력과 열정을 기울였으며, 고전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현대적인 화풍을 보여주었다.

성 세바스찬은 로마 황제 근위대 장교로, 그 당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리어 많은 이들을 개종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국 로마 황제에게 들키고 나무에 묶인 채로 화살을 맞았다. 하지만 한 순교자의 아내가 죽어가던 세바스찬을 다시 살려내어, 그는 다시 황제가 행하고 있던 기독교 박해의 부당함을 알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그를 잡아,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채찍질로 그를 죽인다. 죽은 후 그는 한 부인의 꿈에 나타나, 자신을 찾아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후 680년경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사람들은 세바스찬의 유해를 모시고 장렬한 행렬을 거행하여,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성 세바스찬은 페스트에 대한 수호성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성 세바스찬을 둘러싼 이런 이야기를 귀도 레니의 작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화살을 맞고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그의 작품이 가진 어떤 메시지를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화살이 깊숙하게 꽂힌 성 세바스찬의 육체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 도리어 화살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대비를 통해 그 부각시키는 듯하다. 아름다운 남성의 육체는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동성애적 분위기를 환기시키기까지 한다. 귀도 레니의 붓 끝에서 순교의 순간은 죽음과 무관한 어떤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매끈하고 우아한 성 세바스찬의 육체는 바로크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위를 향해 있는 시선은 신을 향한 갈구가 표현되어 있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염원을 귀도 레니는 이러한 시선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염원으로 그칠 뿐,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남성 앞에서 깊숙이 박힌 화살마저 무력하다는 것뿐일 지도 모른다. 기독교에서 소재를 가지고 왔으나, 귀도 레니의 세계 속에서는 종교에 대한 열정은 꺼져가는 불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꺼져가고 있음을 느낀 귀도 레니는 저 갈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 시대에 다시 신의 영광이 도래하길 염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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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찬(St. Sebastian)
Oil on canvas, 146 x 113 cm
Genoa, Palazzo Rosso
1615-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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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바스찬(St. Sebastian)
Oil on canvas,170  x 133 cm
Prado Museum, Madrid
1630년대 초반

 
* 얼마 전에 관람했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전시에서의 '참회하는 베드로'에서도 귀도 레니 특유의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