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지음), 실천문학사
제법 탄탄하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현력을 가진 김서령의 첫 소설집 읽기의 시작은 매우 유쾌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요즘 작가들은 왜 여기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불쾌해졌다. 도리어 뒤에 찬사에 가까운 평문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나 소설가 이혜경, 문학평론가 서영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러 단편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 이 얼마나 손쉬운 작법인가.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소설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신과 같은 권능을 부여받는다고는 하지만, 이 젊은 소설가의 세계 속에서 곧잘 사람들이 죽고, 그 옆의 주인공들은 슬퍼하다가 지쳐 도망가거나 잠시 잊기 위해 잠이 들거나 그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식으로 끝나버린다. 꼭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물들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고는, 심지어 그 인물들에게 한 줌의 희망, 아니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연 우리들의 삶이란 게 정말 그런 것일까.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에겐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기회마저도 없을 지도 모르겠다. 절망에 빠질 기미가 보일 때면, 케이블 TV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하면 되면 그 뿐이니까. 아니면 술이나 마약을 해도 된다. 그렇게 절망에 빠질 시간마저도 이제 뒤로 미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면 절망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너무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때 위대한 비극의 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그 소용돌이를 힘겹게 이겨내며, 후대의 우리에게 휴머니즘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비극은 없다. 그런 비극적 상황은 너무 많은데, 그 옛날의 그런 주인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런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김서령의 젊은 주인공들은 비극적 상황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는 미성년에 가까웠다. 하긴 우리 시대는 조로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미성년의 시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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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 ![]() 김서령 지음/실천문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