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양화소록, 강희안

지하련 2003. 1. 15. 08:10
양화소록 - 10점
강희안 지음, 서윤희 외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눌와



양화소록(養花小錄)
강희안 지음 (서윤희/이경록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 눌와, 1999



작년 여름 붉은 꽃이 피어있는 서양난 하나를 구해 기르게 된 적이 있었다. 처음 꽃을 기르게 되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빛깔의 잎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꽃도 떨어지고 채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대로 죽어버렸다. 다시 꽃을 사서 기르리라 생각 했지만, 바쁜 직장 생활 와중에 그런 생각은 가끔 말라죽어있는 난을 볼 때뿐이었고 그 사이 해가 바뀌어 버렸다.

해가 바뀌는 동안 나는 강희안(姜希顔:1418-1465)의 <양화소록>을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는 그림으로 알려진 조선 초의 선비 화가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강희안이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여러 것들을 정리해 모은 것이다. 강희안은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천성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양생(養生)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화초의 성품과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될 때마다 그것을 기록하였다. 기록이 끝나자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산림에서 소일하는 밑천으로 삼고, 호사가(好事家)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1쪽)

* * * * * *

내용은 간결하며 옛 문헌들에 실린 각 화초에 대한 설명이나 시, 문장을 언급하고 난 다음 강희안이 그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바를 적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화초를 기르는 것도 자기 수양의 한 방편으로 삼았음은 글 여기저기에서 알 수 있는데, 책 마지막 부분에서 강희안은 ‘꽃과 나무에서 배울 점’이라는 글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것은 키우는 사람의 심지(心志)를 굳게 하고 덕성(德性)을 기르기 위함일 뿐이다. 운치와 지조가 없는 것은 절대로 감상해서는 안 되며, 울타리 주위나 담 아래 적당한 곳에 재배하되 가까이 할 필요는 없다. 가까이 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지조 있는 선비와 비루한 사내가 한 방에 같이 있는 것과 같아서 풍격(風格)이 금방 떨어진다.
(118쪽)

이라고 적고 있다. 특히 연화(연꽃)에 대한 설명은 강희안이 화훼를 재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구절이 많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옛 중국 학자의 구절을 살펴보면, ‘나는 연꽃을 유독 좋아한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흔들리면서도 요사스럽지 않다. 줄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로 뻗거나 가지를 치지 않는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으며 아름답게 깨끗이 자란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두고 감상할 수는 없다. 여러 꽃 가운데 연꽃은 군자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면서 강희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골몰하여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도록 끝이 없다.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를 소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공무(公務)의 한가한 틈에 맑은 바람 밝은 달 아래 향기 진한 연꽃과 그림자 뒤척이는 줄이나 부들을 대하거나 작은 물고기가 개구리밥과 수초 사이로 뛰노는 광경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풀어헤치고 거닐거나 노래를 읊조리면서 노닌다면, 몸은 명예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세상사에서 벗어나 노닐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65쪽에서 66쪽)

이 구절을 보면서 한참을 옛 선비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조선시대의 선비의 글을 읽었다. 살아보면 좋은 글이 많은데,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거리가 먼 것일까. <양화소록>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종로나 테헤란로에서 읽을 때마다 번잡한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속에서 오래된 책 한 권 들고 있는 젊은 사내를 다른 이들은 또 얼마나 낯설게 받아들였을까. 강희안의 글을 읽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나와 현대의 이 세상이 한없이 미워지는 밤이다.



* '양화소록'은 몇 권의 번역본들이 있습니다. 위의 책은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다른 번역본으로 구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