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사이드

지하련 2008. 6. 21. 12:04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지음), 장호연(옮김), 마티, 2008년


 

자네는 새로운 나라를, 또 다른 고향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거네.
이 도시가 항상 자네를 따라다닐 테니까.
자네는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동네에 살다가 나이를 먹고,
결국은 같은 집에서 늙어갈 테지.
자네는 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펼칠 희망은 버리게.
자네를 실어다 줄 배는 없네, 자네에게 열린 길은 없어.
여기 이 좁은 모퉁이에서 이제까지 삶을 낭비했듯이,
세상 어디에 가든 마찬가지로 삶을 망칠 것이네.
-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도시> 중에서(205쪽 재인용)



이 시처럼, 어쩌면,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내 삶을 망쳐왔으니(내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앞으로도 망쳐갈 것이다. (참 무책임한 비유이긴 하지만) 이 지구가 망쳐져 가는 것처럼. 터무니없게도 나는 내가 ‘세속적이고, 기지가 넘치고, 귀족적인 우아함이 있’기를 바랬지만, 이 바람은 거친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무산 계급의 실현 불가능한 대부분의 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런데 그 스스로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도르노 옆에 서서 시대착오적인 말년의 양식을 보여주었던 예술가들에 대해 분석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저작이 그의 유작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도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예술가들의 말년 작품들을 연구했다는 점이다.)



이제 말년의 예술과 반대 방향으로 노화의 길에 접어든 현대 음악은 그저 “악보만 복잡할 뿐 사실상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공허하고 들뜬 여행”(아도르노, <<음악에세이>> 중에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말년의 양식에는 부르주아의 노화를 두고 보지 않고 계속 거리두기와 망명과 시대착오의 감각 - 말년의 양식은 바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 더 중요하게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사용한다 - 을 고집하려는 긴장이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다.
- 41쪽

 

아도르노는 일차적으로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란 그에 따르면 “대상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것에 관심을 두는” 형식이며, “내밀한 형식적 법칙은 이단이다.” 아도르노의 의미로 볼 때 에세이스트라는 존재는 당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영원히 맞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보통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월트 디즈니의 <판타지아>나 호세 이투르비와 오스카 레반트가 출연하여 멋지게 연주하는 할리우드 뮤지컬 등으로 음악 산업이 거대화되어 가는 시대에 여전히 고전 음악을 작곡한 인물이다.
- 141쪽



사이드가 주목하는 말년의 양식은 거리두기, 망명, 시대 착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표범>>과 원작소설인 람페두사의 <<표범>>을 교차시키면서 영화와 소설 사이에서, ‘귀족출신이면서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두 인재가 이렇게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가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은 그 당시 충분한 비평적 지지와 (커다란 성공은 아닐지라도)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거리를 두었으며, 혹은 망명을 선택하거나 종종 과거의 양식 속에서 자신의 작품을 창조하였다. 도리어 그들이 받은 비평적 지지와 대중적 인기도 낯선 것에 가깝다.


모더니즘 문학은 조이스와 T.S. 엘리어트 같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시대를 떠나 신화와 서사시, 고대 종교 의식 같은 옛 형식들로 돌아가려 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말년의 양식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은 역설적이게도 명칭과 달리 새로움을 내세운 운동이라기보다 늙어감, 종말의 운동이 된 것이다.
- 194쪽



'옛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태도'은 한국의 비평가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조로(早老)'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도리어 늙어가는 예술에 대한 반기에 가깝다. 미술도, 음악도, 문학도 늙어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자괴감이고 새로운 것이 있다고 한들, 우리 삶은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에 비롯된 것이다. 이럴 때일 수록 사이드가 말하는 바의 '말년의 양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차르트는 다 폰테와 함께 작업하면서 속죄나 변명의 기회가 아예 없는 세상, 유일한 법은 방탕함과 조작의 힘으로 표현되는 이동과 불안정이며, 죽음에 의해서만 영원한 안식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을 제시하려 했는데, 이렇게 잠재적으로 끔찍한 견해에 <코시 판 투테>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 작품은 결코 쓰지 못했다. 모차르트가 이 오페라에서 독보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이룩한 것은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음악과 그토록 부주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야기의 결합이다.
- 110쪽


로코코 예술가 모차르트의 유쾌하고 발랄한 단음계 속에 숨겨진 음울하고 허무주의적인 세계를 알게 되는 순간, 모차르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이야말로 '말년의 양식'에 속한다. 꼭 장 완트완 와토의 세계처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8세기로 돌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8세기 로코코 자체가 바로 '시대착오'적이었기 때문이다. 상승하는 부르조아 계급 앞에서 성직자와 귀족들은 계속 고개를 뒤로 돌리며서 거리를 두고 망명하고 옛 노래만, 옛 문화만 향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우울하고 유쾌하지만 슬픈 예술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 스스로도 '시대착오'이면서 '시대착오'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사용해 왔다. '시대착오'라는 단어에 대한 새로운 의미 하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년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문학비평가로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철학, 음악, 문학을 가로지르며 폭 넓고 깊이 있는 비평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