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하련 2003. 1. 27. 08:14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지음), 김난주(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55



그는 소설이 끝나고 그 모래의 세계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 속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 속에서 그가 늙어죽고 그녀가 늙어죽고 그들이 살던 집이 모래로 뒤덮이는 것을 아베 코보가 보여주었다면 독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 혹시 그녀처럼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슬프지도 않다. 그저 쓸쓸할 뿐이다. 모래의 세계 속이나 낮고 높은 건물로 둘러쳐진 도시 속이나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은 육체의 고립을 극대화했을 뿐이지, 소설 밖 우리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딘가에 갇혀있었다. 아베 코보는 갇혀있는 우리들의 한 면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아베 코보의 실존주의는 어떤 환경에 고립된 존재, 그 존재가 어떻게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가를 묘사한다. 그러면서 그 의식마저도 고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희망>이 까마귀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그의 바램은 뒤로 밀려나간다. 그녀의 육체 위로 미묘하게 흐르는 에로티시즘은 고립된 존재인 그를 더욱 고립시킨다. 잠시 에로티시즘 속에서 의식을 놓아두고 어딘가에 몰두하지만 남는 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모래의 여자>>는 끝없이 ‘실존주의적 에로티시즘’에 몰두한다. 고립된 공간, 하루라도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무너져버리는 어떤 공간 속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몸을 부대끼며 생을 지탱해나간다. 희망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모래 구덩이 속에서 끝없이 밀려나간다. 그 속에서 꽃처럼 에로티시즘이 피어난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실존적 상황에 파묻혀버리고. 매일매일 마주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건 의미 없는 몸짓뿐이다. 애초부터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에로티시즘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주는 ‘실존주의적 에로티시즘’은 구원도 없고 사랑도 없는 시대의 소설적 반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 아파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이제 ‘실존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고 ‘에로티시즘’만 남게 될 테니까.


모래의 여자 - 10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