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라틴아메리카거장전, 덕수궁미술관

지하련 2008. 11. 9. 20:38



사람들은 라틴 아메리카라고 하면 어떤 것을 떠올릴까? 축구? 삼바축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보사노바? 탱고? 하긴 나는 디에고 리베라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떠올리긴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후 19세기 초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까지 그 식민 시대의 재판(再版)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래 인용문을 한 번 읽어보자.
  

에스파냐의 ‘인디아스’(아메리카) 통상부 기록에 따르면, 1503-1660년 동안 금 18만 5천kg과 은 1천 6백만kg이 ‘인디아스’로부터 유입되었다. 황무지에 가깝던 포토시(Potosi, 현재 볼리비아 소재)는 대규모 은(銀) 광산이 발견된 뒤 인구 16만 명에 이르는 ‘폭발과 소란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당시 아메리카의 식민 도시 보스턴의 인구보다 열 배 이상 많은 수치였으나 그 영화는 ‘폐허가 된 성당, 8백만 원주민의 시체’와 함께 막을 내리고, 19세기 초부터는 ‘세상에서 가장 조금밖에 갖지 못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갈레아노는 아메리카의 금과 은이 어떻게 빈사상태에 처한 유럽 봉건사회를 ‘자본주의적 중상주의’로 변모시켰는지, 광산의 경영자들이 어떻게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을 유럽 경제의 방대한 ‘외부 프롤레타리아’로 끌어들였는지 설명한다. 유럽의 시초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을 촉진시킨 자원의 유출 탓에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와해된 셈이었다. 이렇듯 라틴아메리카의 저발전은 '발전의 낮은 단계가 아니라 (다른 곳의) 발전의 결과일 뿐'이며, 빈곤은 그 대지의 풍요로움이 선사한 역설이었다.
- 박구병, ‘라틴아메리카, 수탈의 역사를 읽는다’, 서울대저널, 2007년 10/11월, 제87호
http://www.snujn.com/article.php?id=1298


안타깝게도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된다. 엘도라도(황금의 땅)으로 여겨지는 그 땅의 천연자원들은 과거에는 유럽 몇 나라의 소유였으며, 현재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다국적 기업들의 소유가 되어있다. 베네주엘라의 대통령 차베스는 이런 이유로 석유를 국유화해버렸다. 당연히 미국은 차베스가 당선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사회주의적 개혁은 초반에는 지지를 받았으나, 현재에는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또한 베네주엘라는 우리엔 미녀들의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엄청난 빈부격차, 기아와 빈곤, 매춘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과거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가 경험한 것이고 현재에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가만히 있었던 것일까? 

이 때 우리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호세 클레멘트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와 함께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현실 정치 참여가 현실 정치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Image:Siqueiros.jpg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David_Siqueiros


Mural by David Alfaro Siqueiros in the Tecpan building in Tlatelolco, Mexico City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David_Siqueiros)


Detail of mural by José Clemente Orozco at Baker Library, Dartmouth College, Hanover, New Hampshire.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ose_Clemente_Orozco )
이 벽화에 대한 자세한 이미지와 정보는 이 웹사이트에서 구할 수 있음: http://www.dartmouth.edu/~spanmod/mural/ 


라틴아메리카에서 오직 두 나라만이 혁명에 성공했다. 하지만 19세기에 혁명과 독립을 이룬 아이티는 최빈국이 되었으며, 카스트로와 체 게베라의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의 고립된 섬나라가 되었다. 
 

1804년 아이티의 독립은 사실 혁명 가운데 혁명이었다. 그런데도 흔히 아이티 독립은 ‘참혹한’ 노예반란으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한다. 어떤 혁명이건 잔혹한 장면은 있게 마련인데, 왜 하필이면 아이티에만 이런 가치판단적인 형용사를 덧붙였을까? 사람들은 왜 ‘참혹한’ 청교도혁명, ‘참혹한’ 프랑스혁명, ‘참혹한’ 미국독립이라고는 말하지 않을까? 바로 아이티의 독립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노예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백인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1804년 당시에는 아이티의 식민 본국이었던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네덜란드는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을 노예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노예반란은 서구진영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으며, 따라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국의 흑인노예들이 아이티 본을 받지 않도록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협이었다. 따라서 ‘참혹한’이란 형용사는 백인 주인이 느끼던 공포의 표현이자, 진정한 혁명을 비하시키는 도덕적 수사이다.
아무튼 신생국 아이티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농민에게 분배하는 등 혁명적인 조치를 통하여 자생적인 성장 기초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바로 그 순간부터 서구로부터, 라틴아메리카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아이티가 빗장을 걸어 잠근 일은 한번도 없었다. 대문은 물론이고 안방 문까지 활짝 열어놓고 환영인사를 보냈다. 그러나 서구 선적의 선박은 아이티를 본 못 체 그냥 지나쳤다. 이렇게 아이티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철저하게 배제됨으로써 혁명의 성과는 이내 빛이 바랬고, 곧이어 세계 최하위의 빈곤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박병규, ‘역사 - 혁명 없는 역사’, 라틴아메리카문학21 웹사이트
http://www.latin21.com/board3/view.php?table=research_uh&bd_idx=4&page=1&key=&searchword=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잘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멕시코에서 세 번에 걸쳐 독재를 자행했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나 장군은 ‘파스텔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잃어버렸던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화려하고 멋진 장례를 치르며 매장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장군은 16년간 절대 군주로서 에콰도르를 통치했으며 그의 시체는 대통령 의자에 앉혀진 채 정복과 훈장을 달고서 치러졌습니다. 30,000명의 농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엘살바도르의 견신론자이자 폭군인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장군은 자기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특수한 추를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관공서의 전등에 빨간 종이를 붙여서 성홍열 전염병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테구시갈파의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프란시스코 모라산 장군의 기념비는 사실은 파리의 중고 조각품 창고에서 구입한 네이 제독의 동상입니다.

(중략)

다시 말하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정신나간 남자들과 역사적인 여자들이 즐비한 거대한 왕국이며, 그들의 한없는 완고함은 전설과 혼동된다고 다룬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은 적이 없습니다. 불길에 휩싸인 대통령궁에 피신했던 프로메테우스 같은 어느 대통령은 혼자서 군대 전체와 싸우며 숨을 거두었고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두 번의 비행기 사고는 인자하기 그지없었던 또 다른 지도자의 목숨과 민중의 명예를 복구했던 민주적인 군인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5번의 전쟁과 17번의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빈 악마 같은 독재자도 출현했으며,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첫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2천만명의 라틴아메리카 어린이들은 채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고, 이 숫자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수를 상회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정치 탄압으로 실종된 사람들은 거의 12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스웨덴의 웁살라 시의 모든 주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실종된 것과 같습니다. 임신한 채 체포된 수많은 여인들이 아르헨티나의 감옥에서 아기를 낳았고 아직도 자기 아이들이 비밀리에 입양되었는지 아니면 군사 정권에 의해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되지 않게 하려는 소망으로 거의 20만 명에 가까운 남녀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만 명 이상이 중미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조그만 세 나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임시로 추정해본 숫자는 4년 간 백만여 명이 폭력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마음씨가 극진하고 돈독한 전통의 나라였던 칠레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백만 명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구는 2백 50만의 작은 나라이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문명국으로 여겨졌던 우루과이는 인구 5명당 한 명 꼴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내전은 1979년 이후 거의 20분에 한 명 꼴로 피난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했거나 혹은 망명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는 노르웨이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가질 것입니다.

(중략)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아마도 존경받는 유럽이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우리를 본다면 지각 있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런던이 첫 성벽을 건설하는 데 3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주교를 갖는 데 또 다른 300년이 걸렸고,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이 인류의 역사 속에 이식할 때까지 20세기 동안이나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심지어 부드러운 치즈와 무감각한 시계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오늘날의 평화의 민족인 스위스인들도 16세기까지만 해도 돈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지 않는 용병들로 유럽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심지어는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제국 군대의 돈을 받고 고용된 12,000명의 독일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고 유린했으며, 8천명의 로마 주민들을 칼로 쓰러뜨렸습니다.

(중략)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단순히 유토피아처럼 보였던 이런 가공할 만한 현실 앞에서, 모든 것을 믿는 우화의 창조자들인 우리는 아직도 그것과 반대인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그곳은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1982년. '가르시아 마르께스'(송병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중에서


이런 상황 속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예술가들은 고통스럽고 처절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이번 덕수궁미술관 전시에 나온 대부분의 작품들이 어둡고 슬픈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심지어 아르테 포베라의 거장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까지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그의 의도는 회화의 형태에 대한 물음이며 회화성에 대한 거부이자 탐구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번 전시 속에서 그의 작품은 모든 역사적인 것들, 콘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 해석되었다. 어쩌면 그는 과거의 모든 것들이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Concept Spatiale', 1959 painting by Lucio Fontana, 100 x 125 cm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Lucio_Fontana )


덕수궁 미술관 안의 많은 작품들이 나를 울렸다. 그 작품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프고 긴 고통의 삶을 담아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마주할 때 그 작품이 어떤 정치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그 작품이 만들어질 때 그 작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오직 작품만 존재하는 세계란 없다.  

전시된 작품들 이미지를 올리고 싶으나, 아무래도 저작권이 마음에 걸려 올리지 못한다. 작품들의 일부는  '라틴아메리카거장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laart.kr/main.html)

라틴 아메리카의 중요하게 평가받는 예술가들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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