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라디오의 잡음

지하련 2008. 11. 15. 23:23


사라져가는 가을의 향기를 못내 아쉬워하는 듯, 비가 내렸다. 올해의 연애도 실패였고 올해의 사업도 성공이라기 보다는 실패의 빛깔에 가까웠다. 독서의 계절은 오지 않았고 작품 감상은 우아해지지 못한 채, 돈에 걸려 넘어지며, 내 감식안을 시험했다.

종일 반쯤 잠에 취해, 술에 취해, 쓸쓸함에 취해 피곤했다. 겨우 밤 늦게 정신을 차리고 설겆이와 청소를 했으나, 나를 행복하게 해줄 어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스턴트커피에 오래된 우유를 잔뜩 넣고 죽는 시늉을 했다. 라디오를 틀었으나, 잔뜩 잡음이 끼인 채, 주파수 사이를 헤매며 겨우겨우 내 귀에 도달했다.

내일 약속은 한없이 뒤로 밀려가는 듯 하고 까닭없는 내 사랑도 한없이 뒤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얼마 전 만난 어떤 이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여주었으나, 나는 그를 도울 힘이 없었다. 불안함이 내 영혼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난 너무 쓸쓸했던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쓸쓸함 앞에 맥없이 무너지며, 우리를 한없이 가난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화려한 거짓말로 이루어진 성곽이며, 성문일 뿐이다. 그 곳엔 이미 아무 것도 없고 정처없는 바람만 오갈 뿐이다.

하지만 이 밤, 라디오의 잡음은 견딜한 것이다. 행복한 어떤 사건이 생겼으면 좋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