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역주 이옥 전집

지하련 2005. 4. 11. 10:08


...... 아침도 아름다웠고 저녁도 아름다웠으며, 맑아도 아름답고 흐려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다웠고 물도 아름다웠고, 단풍도 아름다웠고 바위도 아름다웠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고 가까운 경치도 아름다웠다. 부처도 아름다웠고 스님들도 아름다웠다. 좋은 안주 비록 없어도 막걸리 또한 아름다웠고 어여쁜 창기 없어도 꼴 베는 노래가 아름다웠다. 요약하면,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상쾌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훤히 트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는가 하면 높이 솟구쳐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 담담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화려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어딜 가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누구와 함께 해도 아름답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나는 말한다. “아름답기에 왔으며 아름답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 이옥, 「중흥유기(重興游記)」의 총론 중에서, (한채근 역, <<시인세계>> 2005년 봄, 147쪽에서 148쪽)

어제 자기 전에 읽은 한 구절이다.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이 들어간 글을 처음 읽는데, 새삼스럽게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 서점에서 <<역주 이옥전집 1>>(소명출판, 2001)를 샀다. 18세기 후반, 정조 임금 때의 어느 이름 없는 선비의 책을 산 것이다.

아침 꽃은 어리석어 보이고, 한낮의 꽃은 고뇌하는 듯하고, 저녁 꽃은 화창하게 보인다. 비에 젖은 꽃은 파리해 보이고, 바람을 맞이한 꽃은 고개를 숙인 듯하고, 안개에 젖은 꽃은 꿈꾸는 듯하고, 이내 낀 꽃은 원망하는 듯하고, 이슬을 머금은 꽃은 뻐기는 듯하다. 달빛을 받은 꽃은 요염하고, 돌 위의 꽃은 고고하고, 물가의 꽃은 한가롭고, 길가의 꽃은 어여쁘고, 담장 밖으로 나온 꽃은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수풀 속에 숨은 꽃은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 <<역주 이옥 전집 1>>, 320쪽에서 321쪽.

꽃을 얼마나 보았으면 저런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 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는 글. 그리고 한문을 한글로 옮겨 옮기는 이에 따라 문장의 이음이 틀려질 수 있어, 한문 공부를 하여 원문을 읽고 싶은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옥의 문체를 정조 임금은 괴이하고 불경스럽게 생각하였고 결국 이옥은 끝내 관리가 되지 못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문체반정’이다. 많은 젊은 선비들이 이에 굴복하고 자신의 글 모양새를 바꾸었으나, 이옥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의 글들은 잊혀져 갔다.

서점 구석진 곳에서 겨우 구한 책이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품절이었고 교보에서도 품절이었으며 영풍에서 전집 세 권 중 1권과 3권 밖에 없었다. 종종 고문학 코너를 지나갈 때마다 이런 책을 누가 사는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누가 사는지 알겠다. 국문학과 대학원생이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같은 이들도 책을 사는 걸 알겠다. 아름다운 문장에 미친 이들 말이다.


역주 이옥전집 1 - 10점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소명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