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길을 가다가 울 뻔했다. 20대 시절엔 자주 있던 일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선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말이다. 그 땐 정말 해 지는 오후만 되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눈물을 참으려고 술을 마셨다. 내 나쁜 술버릇은, 변명처럼 그렇게 만들어졌다. 장석남의 시를 좋아했는데, 술에 취하면 다들 그렇듯 기형도의 <빈 집>을 소리내어 읽었다. 조금 나이가 들자,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었다. 킥킥거리며, 당신, 당신 그렇게 부르며 울었다.
시 따위 쓰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소설에 등장할 만한 사람들이 내 꿈에,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는 때도 가끔 있긴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 서교동 성당 안으로 한 소녀의 뒷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이 참혹스러울 때가 있을 뿐이다.
새벽에 잠을 깨어, 서재에 불을 켜고 거실로 나와 방황했다. 요즘 자주 새벽에 잠을 깬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국 상황도 너무 슬프고, 내 사정도 쉽지 않다. 어쩌면 지금 이 나라의 모든 아빠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때 사랑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사랑만이 전부라고 이야기하며 밤 새워 사랑을 노래하는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며, 사랑, 사랑, 사랑하다가, 그녀는 나쁜 년이라며 소리치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자리도 없고 그럴 나이도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더 슬픈 건가.
죽기 직전 실비아 플라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테드 휴즈가 미웠을까.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까. 실비아 플라스가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은 채로 죽었지만, 테드 휴즈는 그 이후로도 삼십년 넘게 살았다.
실비아 플라스의 <달과 주목나무>는 너무 아프다. 읽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저 시를 썼을까.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이 계속 떠오른다. 1979년 진 세버그가 이유 없이 죽은 다음, 1년 후 로맹 가리도 1980년 12월 2일 자신의 입 안에 권총을 박고 죽는다.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렇게 믿었다. (아, 더 이상 떠올리지 말자)
내 꿈은 그저 아래 같은 서재에 혼자 앉아 고양이 한 마리 키우며 지내는 것이다. 고양이 털이 많이 날려 늘 기침을 안고 살겠지. 혼자, 조용히, ... 그렇게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혼자 살았다. 오래된 성당의 비워져 있던 사제관에서 혼자 글을 쓰다 죽었다. 나는 너무 늦었다. 저런 서재에서 혼자 살기도, 다시 사랑을 하기에도, 그리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쓰기에 늦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고 우울한 걸까. 지금 한국 상황 때문일까, 나 때문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참, 이런 서재는 이쁘고 우아하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더 풍경이 좋을 것이다. 누가 저런 서재에 나를 초대해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