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블 이야기 H is for Hawk
헬렌 멕도널드Helen Macdonald (지음), 공경희(옮김), 판미동
해가 바뀔 때마다 외국 저널에서 선정해 발표하는 올해의 책이나 음반, 영화를 찾아보곤 했다. 하긴 그 땐 올해 최고의 전시 리스트도 읽고 관련 기사를 읽거나 스크랩을 했으니, 그런 시간들이 어떻게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 내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늘 읽고 배워야 할 것들이 쌓이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번역 출간된 책이다.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입했으나, 올해 초에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사고 난 다음 두세번 정도 읽으려고 했으나, 초반을 조금 읽다가 그만 두었다. 잘 읽히지 않을 땐, 다른 책으로 바로 옮겨간다. 그렇게 이 책은 서가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올해 초 우연히 꺼내 읽기 시작해 몇 주에 걸쳐 다 읽을 수 있었다. 산문집이지만, 이 책을 읽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린다. 천천히 읽게 만드는 힘을 헬렌 맥도널드의 문장은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책을 좋아한다. 한 문장 한 문장 느린 산책처럼 나아가는...)
그것은 필사적이었고, 세상을 엉뚱하게 읽어냈다. 나는 사물 간의 묘한 연관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별자리 운세를 읽고 그 말을 믿었다. 전조, 엄청나게 많은 데자뷔, 우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들, 시간들. 앞으로 흐르지 않았다. 이제 시간은 내가 몸을 꼭 붙이면 밀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단단한 사물이었다. 눅진한 유동체. 반은 공기. 반은 유리인 것이 양쪽에서 밀려와 기억의 물결을 앞으로 보내고 새로운 사건들을 뒤로 보내, 내가 새롭게 접하는 일들은 마치 먼 과거에서 온 추억처럼 느껴졌다. (35쪽)
아버지가 죽고 그 상실감 속에서 저자는 참매와 만난다.
하지만 참매는 더 듬직하고 잔혹하고 위험하고 무섭고 훨씬 더 보기 어렵다. 정원이 아니라 깊은 삼림지대에 사는 새라서 탐조가들도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숲에서 일주일간 진을 치고 있어도 참매 한 마리 보지 못하고 그 흔적만 더듬기 십상이다. (...) 참매를 찾는 것은 은총을 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18쪽)
이 산문집은 참매 메이블과 만나 매를 길들이고, 매사냥을 시작하며 적응해 나가는 이야기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상실감과 슬픔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고 극복해 나가는지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두 개의 큰 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결국 만나게 되는 건 우리들의 어떤 마음일 것이다. 버리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떤 마음. 끝도 없이 빨려들어가는 진흙 호수같은.
매를 훈련시키려면, 매처럼 그것을 지켜봐야 하고, 그러면서 매의 기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매가 다음에 어떻게 할지 예측하는 능력을 얻는다. 이것은 숙련된 동물 조련사의 욕감이다. 결국 매잡이는 매의 몸짓을 보는 게 아니다. 매잡이는 매가 느끼는 것을 느끼는 듯하다. 매의 불안이 매잡이의 불안이 된다. 시인 키츠가 카멜레온 특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실행한다. 이것은 "자신을 다른 인물이나 상황으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자아의 상실과 이성의 상실을 견디는" 능력이다. 그런 상상 속에 재창조가 내게는 늘 수월하게 일어났다. 너무나 쉬웠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관찰 중인 대상 속에 자신을 넣는 것이 관찰자가 되는 행위의 일부다. 어릴 때 나라는 여자애가 새 관찰을 좋아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을 사라지게 한 다음, 지켜보는 새 안으로 달아났다. 지금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매를 길들이기 위해 나 자신을 매가 지닌 야생의 마음 안으로 넣었고, 어두운 방에서 점점 나의 인간성은 타 버리고 있었다. (143쪽)
예기치 못한 순간, 우리는 급격한 고통과 아픔을 겪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리는 어떤 종류의 사건. 헬렌 맥도널드에겐 아버지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폐허 더미 속에 있었다. 내 안의 깊은 부분이 스스로 다시 지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 모델은 바로 내 주먹 위에 있었다. 매는 내가 되고 싶은 모든 것이었다. 혼자이고 냉정하며, 슬픔에서 자유롭고, 인생사의 아픔에 둔했다. (142쪽)
하지만 이 책을 쓸 수 있었고 헬렌은 자신의 삶과 일상을 지켜냈다.
몇 년 전 은퇴한 유투U2 정찰기 조종사를 만났다. (...) 2400미터 상공 밑으로 세상이 둥글게 펼쳐지고, 위쪽 하늘은 축축한 검은 잉크 같다. 우주복을 입고 욕조만 한 조종석에 갇혀서, 제임스 딘이 죽은 해에 비행한 기계를 조종한다. 세상을 만질 수 없고 그저 기록만 한다. 무기도 없다. 유일한 방어수단은 고도. 하지만 이 사람과 대화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덤덤하게 말하는 고도에 대한 무용담이나 러시아 미그기와의 '사건들' 따위가 아니라, 권태와의 싸움이었다. 9시간짜리 단독 임무 수행. 12시간짜리 단독 임무 수행. 나는 "끔찍하지 않았나요?"라고 물었고 그는 "저 위에서는 좀 외로워질 수도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뉘앙스가 묻어났다. "책을 읽곤 했어요." 그가 예기치 않은 말을 했고, 동시에 표정과 목소리가 변했다. 무덤덤한 예거(찰스 예거, 최초로 음속 돌파 비행을 한 미국의 시험 조종사)처럼 질질 끄는 말투 대신 수줍어하는 아이와도 같은 열띤 말투로 바뀌었다.그가 말했다. "T. H. 화이트의 <<아서 왕>>을 읽었어요. (...) (58쪽 - 59쪽)
이 책의 매력은 단연코 서술의 깊이와 문장의 힘이다. 표현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되었으며, 헬렌과 메이블 사이에 일어나는 작고 사소하지만, 우정의 단단한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슬픔과 상실을 극복해 나가는지를 알려준다. 참매는 애완동물이 아니다. 사람과 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 어떤 신뢰를 만드는 과정은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옛 매잡이들은 이렇게 매가 사람을 개의치 않게 만드는 것을 '와칭watching'(지켜보기)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색적이고 신중하고 진중하며 용기를 주는, 익숙한 마음 상태였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내 삶에 목적이 생겼다. (117쪽)
이 책은 출간된 후 무수한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밀도감 높은 서술과 표현은 독자에게 매사냥에 대한 이해를 넘어선다. 어쩌면 도전일지도 모르겠다.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모하지만 힘찬 도전. 그리고 까다로운 상대와의 만남. ... 다시 읽어도 좋을 산문집이다.
멀리서 보면 메이블 주위에 증기가 나와 휘감아 올라갔다가 모든 것을 살짝 뿌옇게 만드는 게 보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메이블은 강렬하고 구체적인 생생함이 두드러졌다. 메이블은 내 상처를 태워 없애는 불꽃이었다. 매 안에는 후회나 깊은 슬픔이 있을 수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매는 오직 현재에 살았고, 그게 나의 피난처였다. 나는 매의 줄무늬 있는 날개의 움직임에 몰두하는 것으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매 안에 죽음이라는 퍼즐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그 안에 나 또한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