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

지하련 2025. 1. 11. 23:03

 

 

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마크 스트랜드(지음), 박상미(옮김), 한길사.

 

 

호퍼의 빈 공간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퍼의 그림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고,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거기서 멀어지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 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 -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vacancy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집에 에드워드 호퍼 화집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번의 이사와 책 정리로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도 사라졌다. 호퍼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깊이는 사라지고 투명해지며, 그 위로 내가, 네가 떠오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멀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화집에서 아래 작품을 보고, 저 여인은 배우일까, 아니면 관객일까 생각했다. 아니면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호퍼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나 일어난 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상상일 뿐이다. 그의 미장센은 어딘가 허술해서, 그 틈을 비집고 보는 이들은 영화같은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상상 후엔 꽤 쓸쓸한 기분에 휩싸이지. 

 

뉴욕 극장, 1939

 

 

몇 시쯤 되었을까. 거리엔 차가 없고 가게 안에도 손님은 별로 없다. 어쩌면 새벽일 지도 모른다. 때로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술이 깨는,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거나, 비극적인 사랑에서 깨어날 때, 대체로 그렇다. 아니면 삼각관계일지도 모른다. 저 테이블에 앉은 세 명의 사람은. 

 

나이트호크, 1942

 

사다리꼴의 긴 두 변은 서로를 향해서 기울어 있을 뿐 서로 만나지는 않는데, 그 결과 관객은 미처 궤도의 끝까지 가지 못하고 그 중간쯤 머물게 된다. 관객들이 다다르고자 하는 종착지처럼, 소실점은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의 바깥쪽 어딘가, 실재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 (20쪽) 

 


결국 우리는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에드워드 호퍼는 종종 우리들을 드러내는 것처럼 왔다가, 우리의 마음에 상처만 입히고 사라진다. 결국 혼자라는 사실만 깨닫게 한다. 그래서 한 때 호퍼를 좋아했다가 지금은 멀리한 이유다. 그 땐 건강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 혼자였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었고(아니면 혼자라고 소리지를 수 있었고), 지금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자주 예술작품들은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이런저런 경험이 쌓여갈수록 전혀 다른 모습과 의미로 다가온다. 어쩌면 에드워드 호퍼도 그럴 지도 모르겠다. 

 

호텔방, 1931

 

저렇게 혼자,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호텔방에 숨죽여 앉아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녀의 손 위에 놓여진 것은 기차표일까, 아니면. ... 상상이 희망처럼 몰려올 때, 그건 금세 고문이 되고 고통이 되지. 거리는 깊은 어둠으로 물들고 그녀는 아무렇게나 짐과 옷을 던져놓고 오늘을 잊고 내일을 생각하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지.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상하 대비는 마치 쓰러질 것같은 어떤 마음을 표현하는 것같지. 아니면 그녀의 마음일까. 밝게 시작했지만, 어두워질 수 밖에 없는 어떤 마음, 연약한 마음, 슬픈 마음, 사랑을 잃어버린 마음 같은...    

 

오랜만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오래 볼 수 있어 좋았다. 몇 해전 에드워드 호퍼 전시를 가지 못했다. 아주 살짝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으나, 요즘 거의 전시를 보러가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잊고자 벽을 쌓아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좋은 책이다. 몇몇 구절은 에드워드 호퍼를 이해하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된다. 그래서 '호퍼의 빈 공간'이라는 글을 그대로 옮겼다. 박상미 선생의 번역을 자주 읽는다. 이 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