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새벽 5시, 빛의 슬픈 영역 속으로

지하련 2025. 1. 18. 06:48

 

나이가 들수록 변해간다. 몸이 변해가는 걸 적응하기 위해 내 영혼을 얼마나 많은 것들과 싸우고 있는 걸까. 문득 다시, 올해 글을 쓸까 생각했다. 수십년만에 만난 대학동기들에게 이 나이에 한 번 등단해보자, 하고 취기에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글을 잘 썼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글을 쓰지 않게 된 건, 누군가의 삶을, 그것이 허구라 할 지라도 과연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끊임없이 되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그 고통과 번민의 삶을 나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은 가능한가 물었다. 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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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아침을 차려 주었다. 그는 그 전날도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자주 싸웠지만, 그에겐 언제나 여자들이 접근했고 그는 그것을 즐겼다. 나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했지만, 아마,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결혼이란 제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걸로 그를 묶어두었으나, 그건 포장지와 같아서 실속은 없고 그녀 자신도 그 포장지 속에 갇혀버렸다고 여겼다. 술이 덜 깬 상태로 그는 아침을 먹었고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아직 아이는 없었고 결혼한 지 이제 2년 째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결혼도 그녀의 고집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떠나갈까봐, 결혼이라도 하면 그가 변할까봐, ... 그의 가족들도 그녀를 지지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도, 그의 사랑도 포장지로 변해갔다. 결혼은 사랑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의 도구였다. 그는 자주 낯선 여자들을 만났고 그녀는 그것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젊었고 한 때 잘 나가는 모델이었으며 길거리에서 뭇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출근을 하려는 그를 보며, 그녀는 베란다에 등을 지고 섰다. 그를 불렀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안녕, 사랑해'라고 말했다. 창이 열려 있었다. 베란다에 두 손을 힘껏 쥐곤 웃으며 뒤로 넘어 떨어졌다. 아파트 안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슬픈 메아리처럼 떠돌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사랑해라는 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있는 힘을 다해 베란다를 향해 뛰어갔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향해,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가 사라지기 전 베란다를 향해 뛰어갔다고 사람들을 생각했다. 사랑하던 그녀가 죽은 후, 그는 술을 끊었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결국 몇 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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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적을 수 있지만, 그건 마지막 스냅샷이다. 나는 그 장면을 향해 오는 여러 과정들을 상상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 그의 사랑과 그녀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그건 그 사랑,들에 대한 무책임한 행위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글을 더이상 쓸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글은 온전히 이 세상의 사랑과 비극을 담아낼 수 없다. 흉내낼 수 있지만, 그것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최근 종종 이야기들이 떠올라 힘들다. 거참. 그냥 다른 이들의 소설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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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영역

다자이 오사마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쓰시마 유코. 그리고 그녀의 소설 <<빛의 영역>>. 영역본을 구해 읽기 시작할 때서야 한글 번역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빛의 영역은 뭘까. 작은 단층집의 겨울, 넓은 거실에 낮고 긴 햇살이 비치는 곳에 누워 큰 창문 너머로 들리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가게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며칠째 보지 못했고, 그해 겨울 11살의 나는 햇살 속에 멍하니 누워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이번 주말 쓰시마 유코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그녀가 상상했던 빛의 영역 속으로 걸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