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水Le De'luge』, 르 클레지오 지음(* 이휘영 옮김), 동문선.
1988.
* 그대들은 죽음을 모르고 있다 *
익명성: 이것은 누구나 혼잡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현대 도시의
비극적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소와 베송은 이
익명성 속에 자신을 파묻는다. 그래서, 소설은 프랑소와 베송의 뒤를
따라다니며 전개되지만, 프랑소와 베송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가 보는 사람들, 거리들, 풍경들만 독자의 눈동자 속
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주인공 대신 독자의 눈동자 속에 들어온 사람
들, 거리들, 풍경들에서 독자는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
를 제외하곤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줄거
리도, 특별한 인물도 없으며, 아무 것도 특별하지 않은 공간 속을, 특
별하지 않은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홍수'뿐. '홍수' 속에선 그대도
나도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나무조각이라도 잡아야 하건만, 물살이
너무나 세차기 때문에 난 이미 지쳤고,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프랑소와 베송은 그런 나이다. 오, 저주스런 오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