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지하련 2003. 5. 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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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자유출판사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 모든 모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한 - 실제와 그리고 꿈 속의 모험에서 - 운명에 감사해야 될 것 같아요.”

라고 알베르티네는 말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알베르티네나 프리돌린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트릭스>라는 SF영화를 만들고 있는 워쇼츠키 형제가 키아누 리버스라는 배우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게 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모험이나 꿈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태도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슈니틀러의 매혹적인 문장 속에서 세기말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이 평범한 부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베르티네가 낯선 남자에게서 느끼는 성적인 매혹과 프리돌린이 벌이는 흥미로우며 자극적인 여행은 이들의 부부관계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모험은 알베르티네의 말대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는, 때로는 힘들게 여겨지긴 하지만, 19세기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쉽게 봉합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봉합은 20세기를 지난 지금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짓과 위선이라는 가면을 통해 상처난 부위를 감추는 악덕을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아르투어 슈니틀러는 맹렬히 공격하였지만, 이제 우리에겐 봉합할 수 있는 거짓과 위선은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허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위를 벗어나는 순간 고독한 방황과 절망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의 노벨레라는 매혹적인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독자는 결말이 왜 이렇게 시시한거야 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자극적이며 육체적인 사랑을 찾아 떠나는 프리돌린의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게다. 그래서 그의 모험이 보다 현대적으로 표현되고 허무하긴 하지만 자극적인 경험이 되길 바란다.

이런 귀결이 아니라고 해서 이 소설의 감동적인 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책을 펼치기 시작하면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손에서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감동이 좀 철 지난 종류의 것이긴 하지만, <꿈의 노벨레> 뒤에 실린 <어느 극작가의 편지> 또한 감동적인 짧은 소설이다.

국내에는 자유출판사를 통해 번역된 것과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서 번역된 것이 있다. 어느 것이든 상관없을 듯하다. 이번 봄이 가기 전에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좋을 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