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작은 사건들, 롤랑 바르트

지하련 2003. 5. 2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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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and Barthes, Incidents 작은 사건들, 동문선, 2003



검은 피부의 청년, 그가 입은 연두색 바지와 박하 크림색의 셔츠, 오렌지색 양말, 그리고 눈에 띄게 부드러워 보이는 빨간 구두
- 34쪽, 작은 사건들

그가 호모섹슈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1979년 9월 17일
일요일인 어제, 올리비에 G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 나의 태도는 내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부터 그의 수줍은 태도, 혹은 거리감이 날 두렵게 만들었다. 우리 관계에는 이제 어떤 행복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잠시 낮잠을 즐길 동안 내 침대 곁에,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상냥스럽게 다가온 그는 침대가에 앉아서 그림이 있는 책을 뒤적거렸다.그의 몸은 아주 멀리 있었다. 팔을 뻗어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게다가 금방 다른 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절망감 같은 것이 날 휘감았다. 울고 싶었다. 이젠 젊은이들과의 사랑을 포기해야 할 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129쪽

2층 커피숍 창가에 앉아 아래층을 보니, 20대 초반의 연인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서로를 껴안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힘이 있어 보이면서 어떤 확신이 있어 보인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청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여자는 검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사랑의 단상을 떠올렸다. 롤랑 바르트가 쓴 책. 계속 몇 장 읽다 말곤 하는 책들 중의 하나. 바르트의 호모섹슈얼이 반영되어 있을까.

작은 사건들. 아무런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고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상쾌한 수채화 같은 책이다. 매우 가벼운 산문집.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은. 어느 지중해 연안, 한적한 지방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