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플래닝 - 유정식 지음/지형(이루) |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몇 년 동안 비즈니스 컨설팅 업무를 맡아, 고객사의 문제들을 해결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학 전공자였지만, 벤처에서의 경험, 빠른 업무 습득 속도와 이해, 잡다한 지식 등을 높게 평가받아 근무하게 된 직장이었다. 하지만 높게 평가받았다는 요소들은 바로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5개월 정도는 맨땅에 헤딩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이 때도 시나리오 플래닝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나리오 경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삼성의 극적인 방향 전환이 한 일본인의 '삼성이 망하는 시나리오'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시나리오 플래닝은 빙산의 일각이거나, 잘못된 생각에 기반해 있었다. 알고 있는 사실도 다시 검증해야 된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경영이란 난생 처음 당도한 해안가로 와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육지 인근의 바다에서, 수면 밑바닥에 숨은 암초와 고기떼를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러한 불확실성(uncertainty)는 더 커지고 있다. 실은 세계화가 지속적으로 진전되고, 사회가 복잡해지고 정보기술이 발달할 수록 불확실성은 자연스럽게 증가할 수 밖에 없다. '왜 이렇게 불확실성이 늘어나는거야' 라고 투덜댈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이 책은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합리적인 대답을 전달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시나리오 플래닝이 미래에 대한 적절한 예측과 그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예측과 시나리오를 구분하면서 미래란 예측이 불가능한다고 단언한다. 불확실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복수의 미래 스토리를 그리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기업의 자세를 강조한다.
그리고 시나리오 플래닝의 절차는 7개로 나눈다.
Phase 2. 무엇을 알아야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 - 의사결정요소 도출
Phase 3. 변화동인은 어떠하며,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변화동인 규명
Phase 4. 의미 있는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 시나리오 도출
Phase 5.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서술할 수 있는가? - 시나리오 쓰기
Phase 6.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대응전략 수립
Phase 7. 어떤 시나리오가 현실화될까? - 모니터링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기업 내에서 시나리오 플래닝 팀을 구축해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고 꼼꼼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도리어 제대로 시나리오 플래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매우 길고 어렵고 논쟁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시나리오 플래닝의 각 단계를 설명할 때마다 하나하나 예시하고 있다. 아마 제대로 읽는다면, 이렇게 어려운 걸 왜 해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우리는 종종 방법론의 노예가 된다. 마치 어떤 추론의 과정이 마법의 지팡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그 방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다고 시나리오 플래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미래를 읽는 힘을 키우기 위해 어떤 잡지들을 봐야하는지까지 나와 있는 책이다. 어떤 정보들을 모아 어떻게 구조화시켜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즉 이 책은 방법론에 대한 책이지, 이 방법론을 습득하는 것과 실제 시나리오 플래닝하는 것과는 별개다.
시나리오 플래닝의 과정은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를 적절하게 평가하고 이를 시나리오 플래닝 방법론 대로 구조화시키고 시나리오로 만들어내고 다시 모니터링하는, 방대하고 길고 긴 과정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 참 꼼꼼하게 잘 썼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비즈니스 관련 서적들이 다소 듬성듬성하고 논리적인 척하지만, 실은 사례 한 개 정도 제시하고는 넘어가는 느낌이라면, 이 책의 저자 유성식은 하나하나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기업 내의 전략 담당자라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한 권 사서 보관해두기 바란다. 언제 어떻게 사용하게 될 지 모를 책들 중의 한 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