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중심의 상실, 한스 제들마이어

지하련 2009. 5. 10. 12:25

중심의 상실 - 6점
한스 제들마이어 지음, 박래경 옮김/문예출판사



제들마이어는 중세의 낙오병으로 그보다 훨씬 민감하고 환상을 보는 데에 도통한 점쟁이들을 모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논의가 이처럼 코기토 인터룹투스(Cogito Interruptus)의 정말 탁월한 실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암시적이고 이해를 갈망하는 듯한 태도 때문인데, 그는 어떤 기호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우리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며 윙크를 한 다음 "당신에게도 보이죠?"라고 말한다.
- 움베르코 에코, '철학의 위안'(새물결, 조형준 옮김), 116쪽


이 책은 한스 제들마이어라는 독일의 미술사학자가, 1948년도에 썼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낯설고 기묘하며, 반-현대적이며, 도덕적인 교설과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대 예술은 예술의 혼란이며, 반-휴머니즘이고, 반-인간적이며, 결국 중심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그는 세잔에 대해서, '그의 회화는 그의 내면적 의도에 따라서 가시적인 세계의 모든 지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의 혼합으로부터 순화된 순수한 시각을 발견하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순수한 시각을 갖기 위한 이 같은 투쟁은 그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징후'(230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은 죽어 있고, 낯설며, 인간은 그저 외적인 것만을 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정신 생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세계는 불안정한 것이 되어가기 시작한다.'(235쪽)

제들마이어의 시각에서 모든 근-현대 미술은 인간성의 상실을 뜻하며,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치료해야 된다는 것이다. 

유일한 처방은 새로운 상태 안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을 확립해 재형성시키는 것이다. (465쪽) 


다소 황당한 결론을 향해 가는 이 책은 매우 난삽해서, 많은 미술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들이 있지만, 한 번 읽어서는 책의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서술의 시작에서 기대되는 내용과 서술의 끝에서 읽게 되는 내용은 종종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있기도 하다. 마치 고집불통 노인이 젊은 날의 방황을 아름답게 노래하다가 그 방황이야말로 내 인생의 과오였으며, 치명적인 비도덕이며, 잘못이었다라는 말로 끝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런 논리적 허점을 움베르토 에코는 '코기토 인터룹투스'라고 평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이 책을 통해 다양하고 많은 미술사의 정보들과 논평들을 확보할 수 있으며, 현대 미술에 대해서 시대착오적 도덕주의의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