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정치학 -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와인 애호가로서 나는 좋은 품질의 와인을 저렴하게 마시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그 바람이 단기간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긴 와인도 하나의 비즈니스이지 않은가. 우리는 종종 예술가처럼 혼신의 힘과 열정을 다해 포도를 수확하고, 정성스럽게 와인을 만들고, 이렇게 생산된 와인에 대해 마치 예술작품인 것처럼 현란한 수사로 포장된 현학적 평가나 평론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 5쪽
이 책은 와인 라벨의 숨겨진 함의, 프랑스/미국 와인의 역사, 와인 등급 제도의 비밀, 와인 품질, 미국 와인의 정치적 환경, 미국 와인 시장, 유기농 와인, 와인 생산에 대한 다양한 실험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폭넓은 내용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저자의 관점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이 책은 한 번 읽어볼 만하다. 특히 프랑스 와인에서 미국 와인으로 넘어가는 과정, 그리고 미국에서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기울였던 여러 노력들, 현재 전 세계 와인 시장의 구도 등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연코 농산물 시장 관계자들이다. 이 책은 포도 농장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어떻게 주류 시장에서 살아남고 성정해갔는가에 대한 역동적인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나 미국에서 와인은 ‘주류’로 평가되면서 많은 제한을 받고 있지만, 와인은 주류로 평가되기 전에 먼저 문화이며 생활의 한 양식이다. 이런 이유로 와인을 마시기 위한 여러 예절이 요구되며, 한 잔의 와인을 테스팅하는 방법, 잔을 들고 마시는 법이 있으며, 와인 마다 그 와인에 맞는 잔이 구분되어 있다. (실은 와인을 마실 때 이런 것들을 지켜가면서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무수한 와인 가이드북이 있으며, 와인을 배우기 위한 아카데미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된다고 말하지만, 와인을 배우기 위해선 학교(아카데미)에 가야 된다.
그런데 한국의 소주나 막걸리를 이렇게 만든다면 어떨까? 등급제를 도입하고 제법 고급스러운 문화로 만든다면? 아마 웃긴 소리라고 하겠지만, 어떤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기 위해서, 원가경쟁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브랜드 파워이고,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해선 이를 문화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와인을 성공한 농산물 상품이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와인 생산자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와인 애호가로서 이 책은 나에게 와인의 신비스러움을 벗겨낸다는 점에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던) 시장 매커니즘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슬픈 책이라 할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와인을 그만 마시거나 하는 따위의 짓을 하진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