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토요일 오전 서재 청소를 하면서 읽은 또 한 편의 시다. 2002년도에 나온 시집이니, 벌써 7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나에게도 몇 번의 사랑이 있었듯 싶지만, 이젠 흔적마저 없는 폐허일 뿐이다. 채호기의 시집은 사랑에 빠졌을 때, 적당한데, 나에게도 그러한 호사가 올까? 호사스러운 겨울이 오고 파아란 새 잎 돋는 봄이 오면, 내 마음의 폐허에도 따스한 온기로 넘쳐날 수 있을까. 아니면 물과 빛이 서로 섞지 않듯, 희게 미끄러지기만 할까. 내 사랑의 언어들처럼.
새벽,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둠을 두리번거리다 말고 채호기의 ‘수련’이라는 시집을 만진다.
수련 - 채호기 지음/문학과지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