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2010년의 지향 - 내 삶의 制約

지하련 2010. 2. 13. 10:42

 

계획이 필요 없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아니 그렇게 믿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하였습니다. 시간이란 부정되어야 할 어떤 것이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를 나누고 질료 속에 형상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질료 속에 숨어있던 형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변화이고 운동이라고 여겼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운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의 구분이 나옵니다. 이미 목적(telos)이 정해져 있습니다. 단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능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태로 옮겨갈 뿐입니다. A위치에서 A’로의 위치이동도 A라는 가능태에서 A’라는 현실태로의 변화이며, A라는 가능태 속에 이미 A’로의 변화를 일으키는 형상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였듯이 우리의 삶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습니다(ex nihilo nihilo).

 

이미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을까요. 마치 별들의 운동처럼 우리 개개인의 삶이 성공으로 끝나던 실패로 끝나던 정해져 있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며 끝없는 행복이거나 끝간 데 없을 절망과 체념으로 물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이겠지요. 많은 요즘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나 봅니다.

 

변화란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말이죠. 자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저런 과외를 시키는 것도 빨리 미래를 정해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쪼들리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강남 대치동으로 이사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동이 내재해있던 형상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 있던 힘 F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힘 F를 정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몇 해 째 저는 신년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은 계획의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획하지만 계획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실은 외부에 있는 힘 F의 우연성, 불규칙성을 너무 뼈저리게 경험한 탓이며, 그 힘 F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제 개인적 습성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달은 탓입니다.

 

부단한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날 때 웃었으나, 헤어질 때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시작할 땐 두둑했으나, 끝날 땐 텅 비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한 지 10년이 넘었으며, 손 댄 일만 해도 10개가 넘습니다. 황당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일을 했기에, 이제 이직을 하려면 인성 검사까지 받아야 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정받는다는 것과 객관적인 이력서는 그 어떤 연관관계도 없습니다.

 

2010년 저의 계획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힘 F입니다. 일종의 에너지이며, 제약 조건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목적(telos)입니다.

 

제 삶을 제약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먼저 방송통신대 영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술 자리를 자제할 것이고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분간 이직할 생각을 잠시 접어둘 생각입니다. 이직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제가 감당할 여력이 없는 탓이겠지요. 그 동안 해오던 일들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 삶을 제약할 수 있는 주관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올해 사랑을 할 것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만, 누군가를 향한 내 마음은 믿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운동(movement)입니다. 하나의 변화(change)이며 신비(mystery)입니다. 사랑이란 없고 사랑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지우면서 대상을 향해 갈 것입니다.

 

아마 올해에도 내 삶의, 내 일상의 많은 것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실은 모든 사람들의 삶과 일상이 일분일초에도 여러 번 변화하고 있습니다. 단지 눈치채지 못하고 그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할 뿐입니다.

 

아직 제 미숙함으로 인해 제 스스로 주도적으로 변화를 이끌 역량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실은 그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을 깨닫는데 생의 절반을 허비하였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좋아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고 해가 뜨면 반드시 어둠도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지금 어두운 곳에 있다면, 최선을 다해 다가올 밝음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며, 지금 밝은 곳에 있다면 어둠을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이치란 그런 것입니다.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금연이나 다이어트 같다고 할까요.

 

이 짧은 글을 쓰기 위해 두 달이나 걸렸습니다. 역시 계량적이고 구체적인 계획 세우기란 이젠 어려운 모양입니다. 성공에 대한 미련은 없으나, 이 작은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제가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은 곳에 들리시는 분들, 모두 좋은 일들로 가득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