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느 월요일 새벽

지하련 2010. 4. 12. 00:22


일본의 어느 공장에서 나온 지 30년은 더 되었을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은 잘만 돌아가는데, 중국의 어느 공장에서 나온 지 불과 10년 남짓 지난 티악 시디플레이어는 요즘 들어 자주 지친 기색을 드러내었다. 하긴 나도 요즘 너무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고 싶지만, 쓰러지지 않는 걸 보면 나이를 괜히 먹은 것 같지 않다
 

작은 회사에 들어와서, 기획에, 홍보마케팅에, PM, 경영 관리에, 인사에, 영업에, …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 문득 내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끝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고객사를 2배로 늘렸지만, 온전히 내 성과로 보기 어렵다. 문서 작성이야 도가 텄지만, 과연 문서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는가에 대해서도 이젠 회의적이다.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한답시고 자유롭게 한 탓에, 내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지쳐 나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결국은 나는 스페셜리스트를 지향했지만, 스페셜해지는커녕, 아는 이의 말처럼 접시물 지식을 가진 제러널리스트가 되어있었다.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셈이다. 마치 사랑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연애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버림받기 두려워한 탓에 연애마저도 소극적이어서 도대체 남자라는 정체성에 의심이 갈 정도다.


결국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관점에서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 외의 관점에서는 나이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몇 달 전에 구입한 크세나키스 박스 세트. 이쁜 패키지 만큼 음악도 좋았으나, … 영문 자료를 찾아가며 그의 음악에 대해서 정리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젠 의욕마저도 없다. 그저 누군가 그의 음악을 낯설어 하지 않기를.

 


작년 선물로 받은 서양난에 꽃이 폈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음울한 음악이 흐르는 이 작은 사각의 방에도 기적 같은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내 일상에도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생기기나 할 것인가.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해볼까 생각 중인데, 현명한 결정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할 만큼 에너지가 넘치거나 자신감에 차있는 것도 아니다. 올해 시작할 때, 그저 현상유지만으로 올 한 해를 만족해야겠다고 했으나, 그것마저도 꽤 어려운 종류의 일이 되었다. 라이 쿠더의 파리 텍사스 LP는 돌아가면서 우울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이렇게 밤은 가고, 내 마음도 가고, 모든 것이 가고 난 다음, … 내일부터 내가 사랑하는 나쓰메 소세키, 도널드 바셀미, 폴 오스터만 읽어야겠다. 예전같은 기분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그리고, 쓰다만 소설도 몇 개 있었구나. 눈이 신나게 오던 몇 년 전부터. 내가 치명적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지 몇 년 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