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이유선 지음, 라티오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는 참 좋은 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철학에 대한 아무런 깊이도 통찰도 가지지 못한 얼치기 문학평론가들이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적어대는 문학 평론보다 백 배는 더 나은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과 문학을 서로 엇대어 구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글들은 설득력을 가지면서 소개되는 문학작품의 맛을 살리고 있다.
서로가 모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현실화될 때, 여기에서 관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용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오고, 관용은 같이 살기(공존)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관용이 이성에서 나왔다고? 관용이 조화를 위한 것이라고? 이건 이성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데 머릿속에서 나온 이념만 가지고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런 태도는 왈쩌의 표현대로 ‘나쁜(악성) 유토피아’일 뿐이다. (송재우, 역자 후기에서 (마이클 왈쩌, ‘관용에 대하여’ 미토, 2004))
- 168쪽
가장 기억에 남는 인용구이다. 책을 소개하는 서평집의 좋은 미덕은 책의 핵심적인 부분을 잘 소개하고 인용하는 것이 되고, 이 책은 이 점에 매우 충실하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이 놓여진 위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알기에는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문학 작품을 열심히 탐독하다가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사람이 꽤 많다. (…)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진실된 삶의 방식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하자. (…)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철학적인 문제를 던져준다.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률은 어떤 것인지, 양심이란 무엇인지 등등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된 청년이 철학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윤리학 입문서를 읽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 청년이 철학 책에서 얻게 되는 해답은 대체로 두 가지다. 벤담이나 밀 같은 공리주의자들이 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선이다”라는 명제와 칸트 같은 의무론적 철학자가 말하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법이 그것이다. 이런 명제들은 비판적인 사고를 전개해 나가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 주기는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겪고 있는 인생의 고민, 창녀인 소냐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문제와 고통 등등은 모두 사라진 채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차가운 정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그래서 철학 책에서 삶의 냄새를 맡기 전에 대부분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 문학과 철학의 경계(8쪽 ~ 9쪽)
문학을 하기 위해 철학을 전공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둘 다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새삼스럽게 저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책에 실린 서평들이 리처드 로티의 영향 아래에서 씌여졌다고 고백한다.
이 글들은 2007년 6월 8일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교수의 철학을 문학 작품과 일상을 통해 내 나름대로 해설한 것에 불과하다. 프래그머티스트인 로티는 참과 거짓, 현상과 본질, 이성과 감성, 주관과 객관, 절대와 상대, 보편과 특수 등과 같은 개념 틀을 깨뜨리려고 했다. 로티의 철학함의 태도는, 본질적이며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는 철학자들의 지적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문학과 철학의 경계(12쪽)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일상에서 시작하여 철학, 문학작품을 가로지른다. 책 속에서 철학자들의 지적인 강박으로부터 벗어났는지 알긴 어려우나, 적어도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인상 비평일 지라도, 최근의 문학평론가들이 터무니없는 단어들과 자신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현대 철학들로 문학 작품을 읽어내는 것과 달리, 적어도 이 책의 저자는 매우 소박하지만, 솔직하게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일상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또한 그의 솔직함은 아래와 같은 글에서도 드러난다.
그 난해한 철학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여러 권의 책이 이미 번역되어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요 저서 ‘삐딱하게 보기’의 앞부분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역시 너무 어려워서 내용을 이해하기는 곤란했다. 이런 책이 그래도 꽤 팔렸다는 것은 아마도 스티븐 호킹의 난해한 책 ‘시간의 역사’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과 비슷한 현상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니면 내가 한국의 평균독자들의 글 읽는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 18쪽 - 19쪽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지 못했던 대학 시절, 나에게도 인문학은 유행따라 흘러가는 어떤 것이었다. 그 점에서 들뢰즈나 지젝에 대한 이상하고도 기묘한 유행은 나를 참 당황스럽게 한다.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우리의 현실적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정치적 파급효과도 가지고 오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들의 책을 읽고 소비하는 풍토는 낯설기만 할 뿐이다.
요즘 학생들의 상식으로 통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읽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포스트니체주의자인 이들은 아예 ‘본다는 것’을 제쳐두고 철학에 대해 생각하는 듯이 여겨졌다. 이들의 저서는 그 의미가 대단히 불확실한 용어들로 가득 차 있어서 명확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는데, 어쨌든 이들은 철학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책에서 ‘본다는 것’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논외로 하고 있다. 이들은 철학이 개념을 창조하는 기술이라고 주장하면서 관조, 반성, 소통은 철학의 본령이 아니라고 말한다.
- 210쪽
그리고 씁쓰리한 현실 인식...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바뀌었다. 불의에 항거했던 민주주의의 투사들이 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80년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민주투사 치고 국회의원이 되지 않은 자가 있다면 팔불출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었다. 더 이상 독재정권은 없으며, 매판 재벌도 없다. 그리고 옛 투사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대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80년대 대학생들의 얼굴에 드리워있던 그늘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다.
- 151쪽
과감하게 추천하는 서평집이다. 다소 딱딱할 수도 있고 그간 읽어왔던 책들과는 다르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학문과 문학은 우리 일상의 삶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유행하는 학문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아직도 유행하는 책을 읽고 작품이나 일상을 분석하는 글을 쓰는 이들을 보면서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