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우는 이렇게 씌어 있었어도 괜찮았을 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어느 날 나는 국립도서관에 있었는데, 쉰 안팎의 토끼털 모자를 쓴 부인이 내가 있던 책상 앞으로 다가와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 르 끌레지오, '사랑하는 대지' 중에서
- 르 끌레지오, '사랑하는 대지' 중에서
낡고 오래된 책을 꺼내 기억하는 몇 문장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이 일상도 거대한 지구의 운동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토요일의 일상을 오늘에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이 갑자기 많아졌고 이를 헤쳐나가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몸에 이상이 왔다. 휴식이 간절하지만, 막상 휴식 시간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안절부절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고 포기함으로써 어떤 이들의 지지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포기하는 것들이 더 늘어나더라. 마치 작은 구멍이 뚫린 모래댐이 붕괴하듯, 내 영역이 사라지고 있었다.
풍경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땐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경화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풍경화가 신화에서 시작하여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풍경을 담다가 결국 평면화와 도형으로 귀착되는 것은, 마치 길을 가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 풍경의 달라진 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공근혜 갤러리의 마이클 케냐 전시는 현대 사진의 어떤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칸트가 이야기하고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떠나고 싶었던 어떤 것이기도 하다. 마이클 케냐는 이국적인 것 너머 있는 숭고미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진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 카메라 렌즈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간에..
유엔씨갤러리의 '스타워즈'전은 해마다 열리지만, 늘 기대되는 전시이기도 하다. 신인작가들은 그렇게 자리를 얻어 전시를 하고 미술애호가에게 소개되지만, 또 그렇게 몇 년 잊혀지내다가 소리 소문 없이 어느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 다시 그렇게 몇 년 잊혀 지내다가 .. 어느 갤러리에서 ...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르 끌레지오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참 의외의 일이었다. 미셸 투르니에도 있고 밀란 쿤데라도 있지 않은가! 르 끌레지오의 초기작이 가졌던 아름다운 무모함은 후기작으로 올수록 이국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가 사랑에 빠진 거친 숨소리에서 시작해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슬픈 시선으로 변해갔듯이 나에겐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몇 개의 전시를 더 챙겨보고, 리뷰를 또 몰아서 올릴 듯 싶다. 어느 출판사와 원고 약속을 했는데, ... 그것도 차일피일 뒤로 늦어져버렸다. 어쩌나, 내 일상... ... 오늘은 집에 손님들이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