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뤼디거 자프란스키

지하련 2003. 11. 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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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삶과 사유에 대한 철학과 예술)
Wieviel Wahrheit braucht der Mensch?


뤼디거 자프란스키 Rudiger Safranski 지음, 오석균 옮김, 출판사 지호



“분명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삶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거짓, 맹목성, 열광, 낙천주의, 확신, 염세주의 또는 그 밖의 무언가로 도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피난처로 도피한 적이 없습니다. 그 어떤 피난처로도요. … 그 사람은 마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서만 발가벗고 있는 사람 같아요.”

카프카의 연인이었던 밀레나 예젠스카 Milena Jesenska는 카프카의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 Max Brod에게 카프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는가에 대해 적고 있었다. 그리고 카프카는 그녀에게 자신은 ‘삶에 유용한 일체의 공통된 의견이나 의미 부여 행위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삶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어떠한 문화적 친숙함도 느끼지 못하고 어떠한 안전한 피난처도 갖지 못한 발가벗은 인간’으로 묘사하고 설명하였다. 카프카는 아예 자신의 상태를 ‘나의 삶은 태어남에 대한 망설임’이라고 표현했다. 20세기의 가장 문제적인 소설가의 삶은 이랬다.(그리고 이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어떤 규칙을 찾지 못한, 끊임없이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던 현대 예술가들은 다들 이와 비슷했다.)

이 책의 저자가 철학자나 예술가가 동일한 지점에서 움직이는, 동일한 유형의 인간들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카프카, 루소, 클라이스트, 니체는 그러한 듯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초반부는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현대 예술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왜, 하필이면 현대에 와서 격렬한 파열음을 내면서 ‘나’에 대한 집착이 두드러지고 ‘나’ 속으로 몰락해 들어가는가에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여기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는 루소였다.

“장 자크 루소의 천재성은 무엇보다도 인류 문화에 끼친 예견할 수 없었던 결과들 이외에도, 우리 내면의 확실성을 확인하고 재발견했으며, 정열적으로 외부 세계를 논박했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내부 세계와 대비시키게 되면 외부 세계는 소외의 공간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다.”

루소는 ‘진리는 내 안에 있으며, 저기 밖에 있는 것은 모두 허위라는 도취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확신은 진리가 있음을 믿고 진리를 향해갔던 이들 대부분이 가졌던 확신이었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리스 문화의 완결성도 바로 이 세계관이었다.

저자는 루소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위대한 일체감이란 외부 세계가 자기 내면에 있는 태양 앞에서 용해되어 버리는, 또는 외부 세계 전체가 빛을 발하는 내면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일컫는다. 이 두 경우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루소는 어떤 비밀과 예측 불가능한 특성들이 우리 내면에 담겨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자유를 발견해야 하며, 또한 자유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자유는 모든 순간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는 우리를 미결정의 상태로 놓아둔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존재 안에 머물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자발성으로 어떤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카프카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아니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 두려움을 끄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소는 여기에 대해서 긍정하면서 그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유’이다. 카프카의 세계에 대한 불안,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루소의 ‘자유’가 등장하는 것이다.(시간적으로는 역순이지만) 그리고 클라이스트의, 자신의 내적 확신으로부터 비롯된 귀결은 ‘자살’이었고 니체는 사유의 도움을 받아 삶을 발견하고자 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삶을 황폐하게 하는 사유였다.

여기까지 이 책의 초반부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형이상학에 대한 글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은 ‘파시즘’이다. 간접적으로 루소가, 직접적으로 니체가 영향을 주었고 하이데거는 아예 파시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유를 이 책은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그 옆에서 카프카는 ‘서둘러 살인자들의 대열에서 벗어나기, 이른바 범죄에 대한 관찰’이라고 일기에다 적는다.

20세기 후반 많은 예술가들과 문예이론가들이 읽고 감동받았던 발터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을 원했다. 파시즘이 추구했던 ‘정치의 예술화’가 아니라.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정치와 문화(예술)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현대의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21세기 초 세계를 어둡게 드리우고 있는 건 부시의 미국중심주의(미국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에 대한 나의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우 자주 잠을 청하는 것이 두렵다.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카프카 정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땐 월요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날 속이면서 일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종종 사랑이 두렵다. 내가 사랑에 빠질까봐. 그리고 사랑이 날 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이젠 내가 없는 자리에 사랑이 서있을까봐 두렵다.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근대의 테마는 근대 이전에는 목격되지 않았던 새로운 불안을, 더 치명적인 불안을 만들어낸 듯이 보인다. (그런데 이건 실존주의적 테마가 아닌가. 그렇다면 영원히 우리 인간은 이 실존적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단 말인가.)

이 책, 꽤나 좋은 책이다. 저자의 다른 책 <악, 또는 자유의 드라마>도 읽어볼 예정이다. 약간 까다로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천천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리가 요구하는 것은 자기 결단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에 대한 불안은 자유롭고 모험적인 자기 결단과 자기 책임에 따르는 고독에 대한 불안이다. 자유에 대한 불안은 나는 ‘나’여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즉 나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나’여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불안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자유에 대한 불안은 자신의 우연성, 비필연성에 대한 불안이다.”


* 여기에 대한 매우 뛰어난 현대 소설은 로브그리예의 ‘질투’이다. 여기에서 현대 소설이 추구하는 한 극단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