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옮김)
문학과 지성사
책을 다 읽은 지 몇 달이 지났고, 그 사이 여러 번 책을 꺼내 읽으며 노트를 했지만, 쉽게 소개 글은 씌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으니, 나는 거의 십 년 넘게 이 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완독하지 못했다. 자끄 르 고프의 ‘서양중세문명’을 금방 완독한 것과 비교한다면, 이 책에 대한 내 느린 독서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은 두툼하고 활자는 작으며 문장은 길다. 제 1장의 제목은 ‘삶의 쓰라림’이고 이렇게 시작된다.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중세 시대의 여행에 대해 단단히 각오하라는 어투다. 그런데 이 주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대로 드러난다. 라틴어와 병기되는 무수한 인용구, 사례, 문헌들. 우리와는 다른 시대, 다른 사고, 다른 종교 아래에서의 삶, 일상, 문화와 예술은 슬프고 기묘하며 어딘가에선 현대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신에게 있어서는 의미 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nihil cavum neque sine signo apud Deum”
절정기 중세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로 가는 길목의 이정표와도 같은 이 책의 저자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ga(1872~1945)는 문화사, 혹은 예술사가 시작되었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최고의 학자이자, 현재까지 중세 문화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의 이 ‘중세의 가을’은 중세 후기 유럽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이자, 현대인들이 종종 부딪히는 심리적 갈등이나 병적이고 경련적인 마음이 어떤 배경 위에 이루어져 있는가를 파악하는 우회로와도 같다.
이 책은 역사, 특히 문화와 예술에 집중된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대해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연구자들이 늘어나 마치 중세 연구의 부흥기처럼 여겨진 20세기 후반에도 이 책의 명성이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더해진 것도 문화사 연구에 있어 호이징가의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의, 신흥 종교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열정, 그리고 그것이 반영된 여러 종교 의식들은 이제 형식으로만 남아 종교를 지탱할 뿐이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어 변하지 않고 도리어 피폐해지는 삶의 조건들. 신앙의 힘, 기도의 힘 대신 보다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행동들이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 정신은 그 변화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이것이 중세 후기 대다수 민중의 삶이었다. 미학적 형식주의에의 경도는 그 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고딕만의 해결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학적 표현으로 경도되던 형식주의적 세계 속에서도 생의 실존적 물음은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다.
가령 이런 표현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할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신앙의 기운이 깃든다. ‘정신적인 양극 사이의 긴장’, 즉 ‘위선과 텅 빈 편협한 신앙’이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15세기 사람들은 늘 근엄한 신앙에 기괴한 허식에의 애호를 결합시킨다.’
이런 이유로 중세는 종종 현대의 우리에게 낯설고 기괴하며 불가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정신적인 사랑은 쉽사리 단순하고 순전한 육체적 사랑으로 전락한다 Amor spiritualis facile labitur in nudum carnalem amorem”. 이는 단순하고 순전한 육체적 사랑에 대한 교회의 관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성스러운 사랑을 대상으로 한 지극히 관능적인 환상을 용인하는 것이다. 마치 바로크처럼.
호이징가는 중세의 종교 생활, 세속 영역의 확장, 사랑의 방식, 이미지와 상징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한다. 실은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책을 읽을수록 책은 더욱 복잡해지고 다채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마치 고딕 성당의 스태인드 글라스에 비친 햇살처럼.
중세의 가을 -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문학과지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