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빨갱이'라는 단어가 유행입니다. 아직도 이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이 단어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권과 주류 미디어의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반성하지 않겠지만요)
이 단어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단어이며, 무수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외국으로 내 몰았고, 많은 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내었던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좌파, 우파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국의 대다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좌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아래 도표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21에서 작년 초봄에 실시한 조사 결과입니다. 저는 이 도표를 보고 난 다음, 해방 직후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 조사가 떠올랐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글이라 어디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해방 직후 미 군정에서는 남한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을 조사하였고, 놀랍게도 대다수의 주민들이 사회주의자들이였다고 합니다. 아마 아래의 도표와 같았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6850.html
결국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견지에서 '빨갱이'와 '좌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빨갱이=좌파'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빨갱이'라는 이 모호하고 실체적 정의가 불분명한 단어로 인해 '좌파는 빨갱이'가 된 지금 한국의 풍경은 너무 슬프고 화가 납니다.
위 조사 결과에 따른다면,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좀 약한 빨갱이요, 민주당 및 야당, 재야 인사들은 좀 심한 빨갱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 정치판이나 지식인판은 모두 빨갱이 세상입니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지금도 쓰고 있는,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무식한 보수 우익 단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실은 그 단체에 몸 담고 있으신 분들도 한번 Political Compass(www.politicalcompass.org)를 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언제부터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일까요? 잘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빨갱이의 탄생'이라는 연구 서적이 있습니다. 책값이 비싸고 제 전문분야와는 큰 연관이 없는 전문서적이라 사서 읽지 않았습니다만, 주기적으로 이 책 생각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이 단어의 시작과 이 단어가 가진 정치적 의미와 비극상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참 슬프고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이끌어 간다는 여당 정치인들과 보수 언론인들은 아직도 '빨갱이'이라는 단어를 아무런 꺼리김 없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누죠. 확실히 과거 지향적입니다. 한국의 살림을 책임지는 기업인들은 내일 경제 환경이나 비즈니스 환경이 어떠니 하고 있는데,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과거를 노래하고, 여기에 현혹된 대중들은 그들의 노래하는 과거를 따라 합창하는 거죠. 여기서 기업인들도 어쩔 수 없이 과거 합창을 따라 하곤 합니다.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기업인들이야 시장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아래는 출판사의 리뷰를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간단하게 나마 '빨갱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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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여순사건’인가?
기존 역사 서술에서 ‘여순반란’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연결을 갖고 남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로 이해된다. 이러한 인식은 여순사건 발발 당시, 이승만 정부가 발표하고 언론 매체가 보도한 여순사건 인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연계된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고 발표했고, 반란자들이 수많은 인명을 살상 했다고 규정했다. 언론은 정부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 보도했고, 더 나아가 여수와 순천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했는지, 봉기군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는지, 국군은 얼마나 용맹하게 반란 진압에 나섰는지를 상세히 보도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적 파괴자가 되며, 선량한 ‘우리’는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만 피해를 당한 사람이 된다. 반란으로 촉발된 ‘혼란’은 그것이 더 하면 더 할수록, 이를 바로잡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강력한 진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입증한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 역사는 ‘적’과 ‘아’를 선명히 구별하는 냉전 반공주의적 해석 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이 사건을 초래한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갈등의 과정과 성격, 사건의 전개 과정과 반란의 이유, 사건 이후 일어난 체제의 변화와 그 결과, 그 과정에서 무참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고 ‘빨갱이’로 낙인찍힌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들은 완전히 은폐되었다. 그렇다면 여순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여순사건은 분단 정부수립과 국가 건설 과정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주는 감춰진 기반이자 반공체제를 탄생시킨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다. 따라서 여순사건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과 성격에 대한 이해,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이해, 한국 사회에 그 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폭력’과 그 구조에 대한 이해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 역사의 왜곡과 편향, 그리고 역사적 진실과 의의에 접근하길 꺼려하는 태도를 넘어서 여순사건의 다층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이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여순사건 이후 진압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적나라한 국가폭력을 통해 반공체제가 수립되는 국가 건설과 국민 형성 과정이다.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 반공을 제일의 국시(國是)로 삼고, 반공을 애국이라 생각하게 되었을까? 공산주의자가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여겨져 멸시되고, 심지어 죽여도 되는 비인간, 절멸시켜야 하는 악마적 ‘종자’로 비약해 사회로부터 근본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말하자면 이 연구는 ‘빨갱이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연구와 비판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자를 멸시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역사 연구의 답변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2. 한국 사회에서의 ‘빨갱이’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이 용어는 반대자들을 침묵시키며, 정치적 정당성을 일거에 박탈해버린다. 토론과 대화의 정치를 실종시키는 ‘빨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 또는 ‘좌익’이라는 용어와는 다른 쓰임새를 갖는다. 일제 시기의 공산주의자는 독립을 가장 앞장서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해방 직후에도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좌익세력을 ‘빨갱이’로 지칭하였고, 빨갱이를 죽여야만 애국하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빨갱이’란 이미지는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1948년 여순사건을 통해서였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게 되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3. 여순사건과 ‘빨갱이’ 색출
1948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만에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제주도토벌 출동반대’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여수·순천·광양·구례·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군인봉기에 호응한 지역 좌익세력과 학생·주캹들이 합세하면서 ‘대중봉기’로 발전했다. 여수?순천 등지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식량배급, 친일파 반역자 처단 등의 정책을 폈다. 정부와 미군은 진압작전에 나서 10월 23일 순천을, 27일에는 여수를 점령했다. 당시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군(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작전·인사·보급을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주도했다. 하지만 봉기군은 지리산 등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진압군은 각 지역을 점령한 뒤,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협력자 색출을 시작했다. 우익, 경찰에게 지목된 지역주민들은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 되었다. 중학교 교장, 지방 검사 등은 봉기군을 피해 숨어있었는데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고, 한 국회의원은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의 협력자 색출 광경은 국가폭력을 통한 ‘편 가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협력자 색출 과정과 대량 학살은 누가 ‘민족’과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민족 구성원의 자격 심사과정이었다.
반란 주체들이나 ‘주체들로 간주된 자들=협력자’는 정권에 의해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죽음을 당해야 하는 존재, 건전한 사회 건설과정에서 뿌리 뽑혀져야 하는 잡초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계엄법도 없이 선포된 위헌적 계엄령은 주민들에 대한 ‘살인 면허장’이었다.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은 전 지역주민을 반란 협조자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여순사건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봉기군에 죽은 주민들보다 정부 진압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좌익은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선전되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진압 작전이 끝난 뒤, 언론·문인·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이며, ‘악마’이자 ‘비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로부터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비인간적인 악마로 형상화 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사건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에 동조한 대중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해야한다는 압박은 봉기 지역 주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게 하였다. 폭력의 대상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외부의 적(공산주의 집단인 북한)이 아니라 내부의 대중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4. 대한민국과 반공체제의 형성
여순사건은 대중 억압 체제로서의 반공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로 활용되었다. 여순사건에서 경험한 좌익 세력과 대중운동에 대한 공포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작동된 국민 형성의 논리는 대한민국을 반공사회로 만들어 가는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남한 반공체제의 기본적인 구조와 작동 원리를 제시했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실질적인 기반이 된 구체적인 방식은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헌법’과 1948년의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제주사건과 여순사건 등에서 전면화 된 ‘국가폭력’과 ‘숙청의 정치’였다.
여순사건을 통해 전면적으로 등장한 국가폭력은 ‘빨갱이’를 없애기는커녕 끊임없이 ‘빨갱이’를 만들어냈다. 국가폭력이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 그 앞에선 주체들은 모두 잠재적인 ‘빨갱이’로 간주되었고, 폭력의 대상이 된 자가 ‘빨갱이’로 규정되어야만 그 폭력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두 번째는 국가보안법, 계엄법 등의 법제적 폭력이었다. 세 번째는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념적 측면과 더불어 신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생활을 재조직하였다. 촘촘하게 구축된 사회통제의 그물망은 반공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게 한 주요한 원천이었다. 감시받는 존재, 통제받는 존재로서의 대중은 잠재적 적으로 취급되었다. 이승만 반공체제는 사실상 대중 억압 체제였던 것이다.
여순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은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국민이어야 하는가를 결정하였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기본적인 자격 요건이었다.
대한민국은 국가에 대한 헌신의 증표로써 국민들의 땀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땀’이 국민으로의 포섭과 충성의 증표라면, 배제된 쪽에는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역사는 장미빛 대로가 아니었으며, 그 길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는 특정한 이념을 국가 정책으로 선택했다는 데 있지 않다. 반공이라는 잣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의 존재 자체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폭력을 통해 국민 형성의 진로를 찾아갔다는데 반공주의의 문제가 존재한다.
5. 여순사건이 남겨놓은 미해결의 숙제들
궁극적으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고하게 한다. 제헌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 달 뒤에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방식은 모든 권력은 권력자에게 있으며, 권력을 가진 자가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반공체제 속에서 수십 년 간 반공은 의문시되지 않는 가치였다. 반공은 ‘공산주의를 반대 한다’라는 것 이외에는 그 안에 어떤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허한 울림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공허함과 유동성 때문에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다.
61년 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이 던졌던 문제들은 지금도 온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가 여순사건에서 배우고 반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에서 나타났던 국가폭력의 문제, 국민 형성의 논리, 반공주의 문제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기와 결합된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유예되었고, 헌법에 제시된 인민 주권은 언제나 통치권자의 주권에 의해 제약되었다. 여순사건이 역사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정치적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근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순사건이 남긴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롭게 되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