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Wild Sargasso Sea

지하련 2011. 12. 12. 17:34

 


진 리스(Jean Rhys),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ld Sargasso Sea)
윤정길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38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 6점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그래,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전진과 후퇴도, 의심도 주저도, 좋든 나쁘든 간에, 어쨌든 모든 것은 끝이 난 거다. 우리는 세찬 비를 피하느라 커다란 망고나무 밑에 서있었다. 나, 내 아내, 그리고 혼혈 하인 아멜리. 우리의 짐은 굵은 마직포를 덮은 패 다른 나무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99쪽



소설은 짧고, 고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맥이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마치 19세기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들과 20세기 초 의식의 흐름 소설을 묶어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풍경을 뒤로 하여 감수성 예민한 미모의 여성과 예의 바른 신사의, 사랑 없는 결혼에 대한, 밋밋한 풍경화인 이 소설은 앙투아네트의 인생 속으로 끼어든 로체스터를 통해 식민 시대의 폭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시대에 대한 통찰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여자와 남자의 설득력 없는 독백들과 서정적인 식민 풍경 묘사가 전부다. 이 독백들은 의식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한계는 무엇인가. 실은 이 시대의 식민지 태생의 여성과 본토 출신의 남성 간의 결혼이 야기하는 문제는 이 소설이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니 스토리의 특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하게 부각되어야 할 것은 왜 그들은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게 되는가에 맞추어 져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 장소를 사랑한다고 말했지. 그래, 이것이 그녀가 이 장소를 마지막으로 보는 기회가 되게 해주지.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쳐다 보겠어. 눈물 한 방울. 나는 그 텅 비어 증오만 남은 광녀의 얼굴을 보지 않을 거다. 그녀가 안녕을 고하겠지. 그 소리를 들어야지. - 233쪽



 

나는 산들도 언덕들도 강들도 비도 증오하고, 그 색깔들이 무엇이든 간에, 황혼도 증오한다. 나는 이 곳의 아름다움도 마력도 그리고 내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비밀도 증오한다. 나는 이 곳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무관심도 잔인성도 증오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여자를 증오한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그 마력과 그 아름다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목마른 상태로 남겨 놓았다. 내 온 인생은, 발견하기도 전에 이미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그런 인생이 될 것이다. - 242쪽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설 후반부에 급박하게 전개되는 여러 독백들은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에밀 졸라가 어떤 특정한 환경(실험실) 속에 인물들(실험소재)를 집어넣어 현실 비판적이며,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였다면, 진 리스는 제국주의 시대가 무너져가고 노예가 해방되고 흑인과 백인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던 어느 시대에(실험실), 뭇 남성들이 좋아할, 재산이 있는 미모의 여성을 등장시키고, 그 당시 평범한, 예의바른 영국 신사와의 결혼이라는 사건(실험소재와 실험 내용)을 통해 시대의 본질 따윈 드러낼 시도 따윈 하지 않고(안타깝게도 그건 진 리스를 둘러싼 여성주의 비평가들의 몫인 듯), 조이스나 울프에서 영향받은 의식의 흐름을 구사하려고 하였으나, 변덕스럽고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와 현실감 떨어지는 갈등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기 많았던 어느 여성 소설가의 시대 비판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반 독자에게 권할 만한, 그래서 고전으로 남을 그런 소설은 아니었다.


* 리뷰를 올리고 난 다음, 찾아보니 이 소설은 TIME이 선정한 100대 영어권 소설(1923년 이후 출판된)에 랭크되어 있었다. 다소 놀라운 평가이다. 아마 이 소설의 문제성 - 제인 에어에 대한 Hommage(?), 여성주의 소설 등이 높은 평가를 받은 건 아닐까.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