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플라톤, '항연'(Symposion)

지하련 2012. 5. 21. 12:46

향연 - 10점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이제이북스




향연 

플라톤(지음), 강철웅(옮김), 이제이북스



* 이 글은 '독서모임 빡센'의 5월 모임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정리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관계로 문장의 비약이나 비문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궁금하신 점은 댓글을 달아주시면 아는 만큼 답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1. 번역서의 선택 



<<뤼시스>>를 옮길 때 늘 걸리는 것이 ‘필리아’(그리고 ‘에로스’)였고 말하자면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해맸다. 결국 선택은 ‘사랑’을 ‘필리아’에 주고 ‘연애’를 ‘에로스’에 주는 방식이었다. 그 때 해둔 고민 때문에 이번에는 그 말들로 인한 문제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았다. 같은 옮긴이가 앞선 <<뤼시스>>에서는 ‘필리아’에 ‘사랑’을 주었다가 이제 <<향연>>에서는 ‘에로스’에 ‘사랑’을 줄 수 있겠느냐는 고민도 <<뤼시스>> 때 대강 끝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의 <<뤼시스>> 번역을 읽은 이들은 이 작품에서도 당연히 ‘사랑’이 ‘필리아’를 가리키리라고 예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주요 어휘가 ‘필리아’에서 ‘에로스’로 이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말에서도 가장 유연하고 적응력 있는 어휘인 ‘사랑’을 ‘에로스’의 역어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 역자 후기, 205쪽 



고전은 어떤 번역서로 읽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위 역자 후기에서 볼 수 있듯,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라는 두 단어가 있고 이 두 단어의 쓰임새는 다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언어에 따라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니, 철학과 같이 개념을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단어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단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번역서는 읽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상당수의 한글 번역서들이 이해가 전혀 없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상당하다.) 


강철웅 교수의 <<향연>> 번역은 가장 최근에 이루어졌으며, 나온 책들 중 가장 신뢰할 만하다. 



2. 향연Symposion 



Symposion은 ‘함께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술자리의 이야기거리로 ‘에로스’가 나왔을 뿐이고, 그 술자리 대화를 옮긴 것이 <<향연>>이다. 


이런 술자리는 고대 그리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달빛에 핀 매화를 연모하여, 매화가 핀 친구의 집을 옮겨다니며 밤마다 술 마시고 매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평하고 그리고 시를 지으며 한 계절을 보내기도 했다. 가지고 배운 자들의 전혀 현실적 기여가 없는 한량짓이긴 하지만.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이런 이야기가 잠시 언급된 기억이 있다. 


실은 지금도 symposion을 열어서 어떤 주제에 대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사라졌고, 그것 물질적 빈곤 탓이 아닌 상대적 빈곤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양화소록
강희안 저/서윤희.이경록 공역

('양화소록'은 최근 새로 번역되어 나왔으나, 개인적으로, 지금은 품절인 눌와(출판사)에서 나온 '양화소록'을 추천한다. 자세한 식물 사진 도판이 함께 있는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이해를 함께 도울 수 있다. 최근 번역된 '양화소록'(아카넷)은 강희안이 쓴 부분과 역자가 쓴 부분이 잘 구분되지도 않고 역자의 해설이 과도하게 많아, 번역서라기보다는 연구서에 가까웠다.)




3. 플라톤의 이분법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단순히 그리고 솔직하게 그리고 어쩌면 어리석게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은 이런 것, 곧 아름다운 사물이 아름답게 되는 것은 아름다움에 의해서이다는 것이다.” - <<파이돈>> 



다소 번역된 문장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플라톤은 <<파이돈Phaidon>>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개별 사물을 가능하게 만드는 보편개념을 가정한다. 이를 현대적으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우리들이 하나의 사물(즉 하나의 개별적인 사례)이 속하는 그 집합에 그것을 연관 지을 수 없을 때,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서 과학적인 설명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건 집합 개념의 지식을 뜻한다.” - <<희랍철학입문>>, W.K.C. 거드리 (박종현 옮김), 종로서적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세계로 나누는 것은 현실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의 ‘이데아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 ? 생성계의 우리는 이데아 세계 ? 존재계로부터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생성계의 우리는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결여된 존재’가 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원죄’라고 할까. 로마 후기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중세의 시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말해, 보다 좋은 것, 보다 나은 것, 보다 완전한 것을 있고 그것을 향해 살아간다고 하는 순간, 우리는 플라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이 실존을 앞서는 것’이다. 



희랍 철학 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W. K. C. 거스리 저/박종현 역


(그리스철학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이다. 그리스 철학을 넘어 현대 철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잠재태/현실태, 이데아, 질료와 형상, 운동, 아르케 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4. 소년에 대한 사랑



소년에 대한 사랑은 <<향연>> 곳곳에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에 매우 흥미를 가질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이 이야기는 동성애에 대한 역사적 기원이 되지 않을까, 또는 현대 동성애 이론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실제로 동성애 관련 추천 도서에 <<향연>>이 올라와 있다. 일본 에도시대에도 소년 ? 동성애가 유행하였는데, 이 때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관계로 동성애가 발생했다고 한다. 


<<향연>>에서 나오는 소년에 대한 사랑도 정치경제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배경을 가질 것이나, 충분한 설명을 얻지 못했으며, 또한 <<향연>>에서 동성애는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5.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사랑, 에로스eros 



“휼륭한 자는 초대받지 않고도 훌륭한 자의 잔치에 간다”는 속담 패러디가 구사된다. 소크라테스에게 붙인 ‘아름다운’(kalos)이 ‘휼륭한’/’좋은’(agathos)과 통한다는 것, 아가톤(Agathon)의 이름이 ‘훌륭한’/’좋은’을 뜻한다는 것이 작품 전체의 흐름과 관련하여 주목할만하다. 

- 작품 안내, 11쪽 



이와 관련해 거드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Kalon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정확한 영어 해당어가 없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역어인 “beautiful”이라는 말로는 결코 적합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 거드리, <<희랍철학입문>>, 112쪽(박종현 역, 종로서적)




그리스적 의미에서 ‘아름다움’과 현대에서 이야기되는 바 ‘아름다움’은 전혀 다르다. 가령 우리는 여성에 대해서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대체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들을 떠올려보라. 여성을 그린 조각상은 밀로의 비너스 정도 떠오를 뿐, 대부분 남자 조각상들이다. 그것도 미끈하게 빠진. 


그리스 시대는 ‘선한 것’, ‘좋은 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를 ‘칼로카가티아 

Kalokagathia’라고 말한다. ‘선미善美’라고 하는데, 아르놀트 하우저는 ‘육체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의 균형이라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설명한다.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는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에로스)이지요. 그래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 <<향연>>, 204b (129쪽)



우리는 편의상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라고 옮기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설명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미학에서 중요한 단어가 되는데, 실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정의부터 내리고 난 뒤 에로스에 대해 논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하는 통에 아름다운 작품이라든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연모나 사랑 따위로 해석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아름다운 것에는 좋은 것, 선한 것, 완전한 것이 된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이데아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이거나 진리일 것이다. 반대로 이데아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왜냐면 그것들은 좋은 것이며 완전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데아를 향해 가는 길목에 있는 어떤 사랑’이 된다.


에로스가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사이에 있다는 점, 그리고 신조차도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고 이 둘에서 결국 에로스가 가사자(죽을 수 밖에 없는 자, 인간)와 불사자(죽지 않는 자, 신) 사이의 중간적 존재 즉 신령(다이몬daimon)임이 귀결된다.

- 작품 안내, 19쪽 



헤르메스 조각상이다. 고대 그리스 후기, 초기 헬레네즘(혹은 그리스 낭만주의)에 속하는 조각상으로, 남성이 가지는 아름다움이 표현되고 있다. 이 조각상과 비교해 그리스 시대의 여성 조각상은 그 유려함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6. 에로스와 불멸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의 과정을 에로스의 기능으로 설명하나, 이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남녀 간의 만남, 결혼 등을 넘어서 있다. 아름다운 것 안에서의 출산을 거듭하며, 이를 통해 불사한다는 견지는 마치 리처드 호킨스의 ‘밈Meme’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앎으로의 상승’을 이끈다. <<향연>>에서 인용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몸에 있어서 임신한 자들은 여인들에게로 더 향하고 이런 방식으로 사랑에 애타는 자들입니다. 아이 낳기를 통해서, 장차 이어질 모든 시간을 위해, 불사와 기억과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행복을, 자신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려 하면서 말입니다. 반면에 영혼에 있어서 임신한 자들은 … 몸에 있어서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이 영혼에 있어서 임신하는, 그런 자들이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무엇을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 적당한가요? 사리분별과 여타의 덕이지요. 시인들도 그리고 장인들 가운데 창의력이 있다고 말해지는 자들도 다, 바로 이것들을 낳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리분별 가운데서도 단연 가장 중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국가들과 가정들의 경영에 관한 사리분별인데, 바로 그것에 붙어 있는 이름이 바로 절제와 정의입니다. - 208e, 209a 



몸에서의 출산 과정이 있듯, 영혼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음을 <<향연>>에서는 디오티마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 210d  



즉 에로스는 결여된 자로서 살아가는 생성계의 우리들에게 완전한 앎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계를 향한 사다리를, 통로를 열어준다. 



7. 실존주의로 본 '향연'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앎을 획득할 수 있는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결여된 자로서의 우리는 과연 에로스의 도움을 받아 존재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신비주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근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답게, 존재계의 흔적이 생성의 세계에도 있다고 여겼다. 그것이 근대적 사유, 생각하는 나였다. 그것은 존재계는 기하학적 세계이며, 그 기하학적 세계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이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해석되어졌고 물질문명은 발달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던 것일까? 우리가 아는 기하학은 불완전한 것이며, 동어반복일 뿐이었다. 극미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귀결이고 ‘서로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난다’는 것이 19세기 후반의 수학에서 드러나게 된다. 


실존주의자들은 물 자체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나눈 칸트,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에서 더 나아가 그래서 현실 세계의 우리는 결여되었고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플라톤 <<향연>>의 ‘에로스’는 타락한다. 결여된 우리를 완전한 우리로 만들 수 있는 에로스 따위는 없다. 고작 결여된 우리를 세속적 방식으로 위로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이 될 것이며, 자포자기이거나 별의 지도를 잃어버린, 방랑하는 영혼의 타락한 벗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