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나르

지하련 2005. 4. 10. 23:39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의 운명. 그/그녀는 현대에 속하지 않고 고대에 속한다. 그/그녀는 현존하지 않고 오직 그림자로 왔다가 그림자로 사라진다. 침묵 속에 있으면서 수다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숨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나, 실은 그/그녀는 끊임없이 여행 중이다. 우아한 몸짓으로 시간 속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소설은 이제 스토리도, 플롯도 지니지 못한 채, 소설의 운명, 책의 운명, 독서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 속하는 것들이 가지는 이 때, 이런 책이 읽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실은 이 소설은 거짓말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먼지가 될 것이고 한 때 반짝이는 낡은 행성 같은 것이어서 조만간 폭발하여 우주 속으로 부서질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공적인 일res publica 전부가 속화되고 금전에 좌우되는 반면에, 시간, 이타성, 자연, 역사, 성스러움, 언어 혹은 적어도 언어의 묘사까지도 사적인 일res privata이 되었다.”(126쪽)

 

맨 처음 소리 내지 않고 읽었던 중세의 신부는 낯설게 보였다. 그러자 읽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렸고 근대의 개인주의는 어쩌면 이 소리 내지 않는 독서에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봄날 오후, 책 읽는 그는 한없이 낯설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둠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기에 여념 없다. 세상이 밝아질수록 책 읽는 자들은 어둠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이 소설은 우아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현대를 거부하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