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

지하련 2004. 7. 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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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지음), 문학과지성사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대학 시절 읽고 난 이후 최윤은 성실한 한국문학 번역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코는 없다'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으나, 그들의 하나코처럼, 나에게도 그 짧은 소설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힘을 내고 싶지만, 기운을 내고 싶지만, 다시 한 번 날아오르고 싶지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해, 힘을 내어본 적도, 기운을 내어 본 적도, 날아올라본 적도 없다는 걸 ... 하지만 안개 속에선 안전하지.

어떤 이유로 '하나코는 없다'가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걸까. 문학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다시 읽고 난 다음, 문학상을 받을 만한가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하긴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으며 모든 걸 과거의 일로, 지금 일어나는 일은 먼 미래의 일로 여기고 싶을 정도로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고통과 상처들을 돌이켜볼 여유도 없으니.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이건 글쎄, 굳이 지금 볼 필요가 있겠어. 나중에 하면 되겠지. 내 인생도 밀리고 내 인생처럼 이런 저런 생각들도 뒤로 미루고 내 사랑도 저리로 밀려가버리지. 나도 꽃을 키워볼까 하지만, 그건 전설같은 ...

출근길 가을 대기가 무거운 게, 가슴 한 곳이 쓰리다. 쓰린 곳을 도려내어 진한 커피 잔 속에 담그며 더 이상 아프지 말아라. 더 이상 아프지 말아라 라고 말을 되뇌인다.

더 이상 내 것들이 아닌 이 세상이니, 최윤도 그렇게, 사람이나 마을, 어떤 사건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짧은 대사 속에 숨긴다. 인물들은 어떤 행동을 하지만, 파란 불일 때 건널목을 건너가는 행동이 되지 못하고 파란 불이 켜진 건널목 앞에서 서서 '난 지금 건널목을 건너고 있어'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들을 타자화시키고 싶어하며 결국 자기자신마저 타자화시키기에 여념없다. 그러자 인물은 배경 속으로 묻히고 사건은 드러나지 않고 모든 것들은 해프닝처럼 그렇게 독자들 앞을 지나갈 따름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 앞에 서서 사뿐하게 지나는 문장들을 보면서 감탄해할 지 모르나, 향기는 없고 '향기가 난다'라는 소리만 들었다는 걸 아주 오랜 후에 깨달을 게다. 아주 오랜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