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라파엘전파, 팀 베린저

지하련 2004. 9. 19. 11:59


라파엘전파 - 8점
팀 베린저 지음, 권행가 옮김/예경

팀 베린저(지음), 권행가(옮김), <<라파엘전파>>, 예경, 2002년(초판)



예쁜 그림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라파엘전파. 대다수의 미술사가들이 그 가치를 폄하하고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미술, 그래서 '위선과 기만'의 시대로 알려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미술 양식.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라파엘 전파 화가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 어쩔 수 없이 그 가치를 인정해주기에는 그들의 작품들이 그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노력한 책이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시작으로 존 에버릿 밀레이, 번 존스, 매독스 브라운 등의 일군의 예술가들이 그려낸 세계를 그 당시 영국 미술계를 주름잡았던 비평가 러스킨의 세계를 비교해가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3장 근대생활에서는 라파엘 전파가 20세기 후반의 미술사학자들에게 흥미로운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있는 의미 있는 챕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 책을 굳이 사서 읽을 필요는 없을 듯싶다. 차라리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알 수 있는 역사책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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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 책을 참조하면서 라파엘 전파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한 글입니다. 이 책의 저자와는 다른 시각에서 쓰려고 노력한 글이므로 부분부분 책의 내용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라파엘전파(The Pre-Raphaelites)는 1949년 스무 살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자신의 작품에 PRB(Rre-Raphaelites Brotherhood)라는 이니셜로부터 시작된다. 다분히 그 당시 영국 미술계에 대한 반항의 몸짓이었고 그가 보기에 회화는 라파엘 이전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나 후기 고딕의 미술 양식으로 돌아가야 되었다. 그래서 그를 반동적인 화가로, 라파엘 전파를 반동적이며 혁명적인 화파로 이해할 수 있으나, 실은 그렇지 못한다.

그들이 공공연히 내세웠던 주제의식은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 중의 하나이며 그들의 작품이 고딕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 또한 19세기 복고적 낭만주의의 한 유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복고적인 낭만주의는 공장제 산업의 발달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퓨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 1812-52)은 1440년의 카톨릭 마을과 1840년의 같은 마을을 비교하면서 근대 도시가 퇴보하였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일련의 고딕적 경향은 라파엘 전파에게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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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N Pugin, 'Contrasts', showing the same town in Victorian and middles ages'.
http://www.pugin.com/ : 퓨진 소개 웹사이트. 19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따라서 라파엘 전파를 혁신적인 미술 양식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인 셈이다. 에드워드 번 존스는 아예 스태인드 글라스를 제작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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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dding of Sir Tristram, 1862, stained glass designed by Burne-Jones for the music room at Harden Grange, Bingley

그리고 이러한 고딕적 경향은 라파엘 전파 특유의 유미주의적 경향,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가진 여성을 드러내어 자기 파괴적 경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후반의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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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hirlandata, 1873, oil, Guildhall Art Gallery at London
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


라파엘 전파에 속했던 여러 화가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긴 이로는 포드 매독스 브라운일 것이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과 가족에 대한 위선적 태도를 캔버스를 통해 드러냄으로서 다른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과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래의 그림 속에서 아내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지만, 이미 아이는 죽은 듯 표현되어 있고 화면은 어둡고 불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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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d Madox Brown (1821 - 1893)
'Waiting: an English fireside of 1854-5'
1851 - 55
Oil on panel, 30.5 x 20cm


아예 이 작품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여성의 머리 뒤로 보이는 거울은 그녀를 성모 마리아처럼 보이게 하고 아기를 아기 예수로 보이게 한다. 다분히 반종교적인 그림은 그 당시 문란했던 성 풍습과 사생아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남성들에게는 일종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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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d Madox Brown (1821 - 1893)
`Take your Son, Sir', 1851-92(?)
Oil on canvas
705 x 381 mm
painting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대표적인 작품인 <수태고지>에서도 성모 마리아는 소극적이며 다소 주눅이 들어있는 여성처럼, 천사 가브리엘은 적극적인 구애를 표현하는 남성처럼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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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ce Ancilla Domini! (The Annunciation), 1849-50, oil, Tate Gallery in London.


라파엘 전파에 속했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고딕적 낭만주의를 이어받고 있으며 종종 낭만주의의 병적인 태도까지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과 기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빅토리아 시대 속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시대 속에서 종교 속으로, 유미주의 속으로 자신의 세계를 옮겨가지만, 그 속에서도 안주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 경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후퇴적인 미술 양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