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리뷰

유현경, <은주>

지하련 2018. 7. 1. 11:18



은주

유현경, oil on canvas

180*140cm, 2017 

출처: http://www.mu-um.com/?mid=02&act=dtl&idx=2370



화가와 모델은 마주 보는 거울처럼 각자 서로의 모습을 비추거나 튕겨내면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장면들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두 시선이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힘이 균형점에 도달할 무렵, 작품의 의미가 완성된다.

'은주'라는 작품도 그런 과정을 통해 구성해낸 결과물이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작가는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모델은 아무 것도 후련하게 내보이지 않았고, 화가는 뭘 포착해야 할 지 몰라 미로 속을 헤맸다. 

- 이주은, <모델, 화가 그리고 예술권력>, 중앙일보 2018년 3월 3일 



이주은의 글을 보고 작품이 무척 궁금했다. 일요일 오전 메모해둔 노트를 우연히 발견하고 작품을 찾아보았다. 작가의 말대로 작품은 어딘가 막막하고 답답해 보였지만, 그건 작가가 아니라 모델이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 모델을 잘 옮긴 셈이다. 


우리는 자주(너무 자주)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해결하거나 명확해져야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이 문명이 만들어졌고 철학에서 말하는 바 '이성'이란 것도 그렇다.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의 노예다. 결과가 있으면 무조건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면 그건 이성이 탐구해야 될 영역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연코 도덕이란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진짜 그런 걸까. 


현대의 반-이성주의는 여기에 기초해 있다. 즉 이 세상은 너무 자주 우리를 막막하고 답답하게 만들고 그렇게 버려두고 저 멀리 우리를 원인도 모를 어딘가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절망에 휩싸이는 것도 이 때문이고 현대의 예술가들이 끝없는 실험의 방황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야흐로 현대란 이 문명의 기조를 정한 어떤 것,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적인 것들에 대해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냥 막막하고 답답한 게 원래 이 세상이라 여기고 그대로 옮길 순 없는 걸까. 그리고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어떤 이론에 따르면, 그 막막하고 답답한 풍경을 마주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건 작가가 아니라 관람객이다. 현대 예술의 장점은 어쩌면 이런 무책임함(?)이 아닐까. 그래서 저자는 사라지고 익명의 관람객들만 남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관람객들이 캔버스에 담기게 될 것이다. 


전시 보러가지 않은 지 참 오래되었다. 나도 조금은 무책임해진 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장소들과 존재들에 대해서. 그런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