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회화의 이해, 리오넬로 벤투리

지하련 2018. 12. 22. 10:31


회화의 이해 Pour Comprendre La Peinture (Painting and Painters) 

리오넬로 벤투리 Lionello Venturi (지음), 정진국(옮김), 눈빛, 1999 




인문학 책읽기란 쉽지 않다. 어떤 땐 쉽게 읽히더라도 어떤 때는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인문학 책읽기는 한결 편해지고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을 가질 수 있다. 회사 생활로 바쁘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런 이해와 감동 때문이리라. 


이 책은 불어판을 영어판과 비교해가며 번역되었다. 영어판의 경우, 벤투리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불어판은 그렇지 못하다. 중역인 셈인데, 그렇다고 읽기 불편하진 않다. 


리오넬로 벤투리 (1885 ~ 1961) 


리오넬로 벤투리의 책은 한 두 권 번역되었으나, 서양 미술사 책이니, 대중적인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미술에 관계된 이들마저 읽지 않거나 대학 시절 잠시 수업 교재 목록에 올라왔을 때 들춰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어쩌면 실제 읽혀져야 할 뛰어난 책은 제대로 읽히는 경우가 드물고, 도리어 미술 작품에 대한 깊은 공감과 감동이라곤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저자의 얄팍한 (이론) 책들만 읽히고 팔리는 건 아닐까. 


이 책은 르네상스 미술부터 현대 미술(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과정을 신과 인간, 자연, 정신과 육체, 추상과 환상 등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기술하였다. 대체로 이런 유형의 저서들은 개별 작가나 작품에 집중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시대 분위기나 양식의 변천 등에 집중하면서 서술되어 전반적인 흐름을 쉽게 알 수 있으나(편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작가나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런 미술사 책을 읽으면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차이를 설명할 순 있으나, 티치아노와 카라바지오가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 다른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동시대 미술가였던 지오토 디 본도네와 시모네 마르티니가 왜 다른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왜 윌리앙 부그로나 장 프랑소와 밀레가 형편없는 예술가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미술사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상학적인 해석이나 미술 양식의 변천 뿐만 아니라, 왜 이 작가와 작품이 중요한지, 이 작품의 어떤 면이 혁신적이며 이 혁신이 후대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이러한 도전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래서 결국 이 작품이 얼마나 새롭고 감동적인가를 머리가 아닌 눈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확실하다. 벤투리는 개별 작가와 작품에 집중하면서 현대미술에 이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아래 인용들은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오토, <요하임과 목동들>, 1305년경 



지오토는 평면상의 전개와 공간의 감각 사이에 지극히 희귀한 종합, 내적 데생과 구조 속에서 이미지의 극단적인 단순화를 통해 드러나는 종합을 찾아낸다. 신성의 이미지는 제시되고, 인간의 삶은 재현된다. 즉 이들의 종합은 잠재적 에너지로 충만한 평형에 의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지오토의 이미지들은 추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에 포착된 인간들의 이미지로, 어떤 계급이나 어떤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또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로, 모든 물질을 능가하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인간이 된 신성은 동정심과 사랑에 대해 말한다. 또 신성화된 인간은 위엄과 정신적 위대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43쪽) 




시모네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년경 



시모네 마르티니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단한 전통적 수법들을 고집했다. 그는 지오토가 배척했던 모든 속성들에 열광했다. 즉 운동, 장식, 기교, 세부에. 그리고 특히 지오토가 무시했던 관념적인 것, 즉 미를 실현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지오토는 물질적 미에 마음을 두기에는 너무나 영적인 것으로 가득한 천성을 지녔다. 또 천상의 미를 걱정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반대로 시모네 마르티니는 천상의 미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발견했던 것은 섬세하고 미묘한 은총의 꽃이었다. 이는 하나의 온실의 꽃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시모네 마르티는 궁정의 귀족적 생활을 신성한 생활과 혼동했고, 세속적 미를 천상적 미와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고, 세련되고, 귀족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희귀한 분위기 속에는 신성한 것도 인간적인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인격은 분명 지오토의 인격보다 한결 폭이 좁다. 아무튼 그 한계 내에서, 그 또한 예민하고 온화한 완전성을 찾아냈다. 프랑스는 사라으이 궁전에 대한 시를 지어냈었다. 시모네 마르티니는 사랑의 궁전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였다. (44쪽) 


벤투리는 지오토와 마르티니의 비교를 통해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어떻게 나아가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각 시대별로 중요한 화가들과 작품들을 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비교하고 분석함으로서 개별 작가나 작품에 대한 이해와 감상 뿐만 아니라 그 너머 미술의 변화를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티치아노,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1570 - 71 


그의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는 빛의 개념에 있어서 하나의 시금석이다. 여기에서 '보편적 빛'과 '특수한 빛'을 구별하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야외에서 한낮동안의 빛은 보편적이가. 그것은 인체와 모델을 감싼다. (... ...) 달리 말해서 이미지의 빛으로 밝혀진 부분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상상되는 어둠에 잠긴 부분의 존재를 암시한다. 바로 이것이 특수한 빛의 효과이다. 또 이런 특수한 빛을 표현하는 화가는, 형상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빛의 효과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더구나 조형적 형상은 은연 중에 어떤 무게를 감지하게 하며, 형상의 운동은 언제나 이 무게에 의해 제한될는지 모른다. 반면에 형체가 없는 빛은 하나의 지속적 파장으로서, 결국 환상적인 운동이다. 특수한 빛은 번개의 속도를 갖는다. 즉 빛은 건드리고, 드러내고, 이내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빛은 심지어 주저앉은 형상에도 운동을 부여하며 또 운동 못지 않게 동태를 강조한다. (108쪽 - 110쪽) 

 

빛에 대한 설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벤투리는 두 가지 빛을 구분하고 이것이 엘 그레코, 카라바지오, 렘브란트 등으로 연결지어 설명해나간다. 이러한 설명들은 책 전체에 걸쳐 있으므로, 이 책은 르네상스 미술부터 현대 추상 미술까지 한 눈에 파악하면서 주요 예술가들까지 보다 깊은 수준에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따라서 생각보다 읽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카라바지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성 마태>, 1592년경 


르네상스초기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인상주의를 지나 추상미술을 향해가는 후반부는 더 흥미진진하다. 쿠르베, 르느와르, 세잔, 피카소로 오면서 미술사가 어떻게 작가와 작품, 그리고 시대의 흐름과 연결하고 해석하는가를 알 수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시중에서 이 책을 구할 수 없다는 것. 다시 출간되기를 기대해보자. 


좋은 책은 그냥 책 내용을 옮기게 된다. 이 책도 그렇다. 서평은 어렵고 요약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주요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보기 드문 책이기에 읽어보길 권한다. 또한 미술작품에 대한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도 알게 해줄 것이다. 





회화의 이해 - 10점
리오넬로 벤투리 지음, 정진국 옮김/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