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카사노바의 베네치아, 로타 뮐러

지하련 2005. 12. 1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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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 뮐러(지음), 이용숙(옮김), <<카사노바의 베네치아>>, 열린책들, 2004





베네치아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를 가로질러 가듯이 지나간다. (중략). 그러면서 언제나 오로지 그 장면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연극배우들처럼 보인다. 극은 오직 그 곳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이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못하고, 그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중략)
베네치아는 모험의 이중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뽑혀 바다에 떠 있는 꽃처럼 인생에서 뿌리 없이 유영하는 모험 말이다. 베네치아는 모험의 고전이었으며 현재도 그런 존재로 남아 있고, 온갖 모험의 총체가 갖는 최후의 운명을 구체화한 도시다. 이 도시는 결코 우리 영혼의 고향이 될 수 없으며, 다만 하나의 모험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 게오르그 짐멜의 <베네치아> 중에서


붉은 빛깔의 천으로 싸진 양장 본은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 때,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그 존재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한 사철 방식으로 제본하고 붉은 색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꼭 18세기의 베네치아가 가면을 쓰고 도시 전체를 무대로 만들며 도시의 꺼져가는 생명을 숨기려고 했던 것처럼, 이 책도 인생의 모험은 되도록 피하고 공무원적인 삶만이 각광 받는 이 때, 사랑의 모험을 즐기고 도박과 여행과 방랑을, 그리고 무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던 문필가로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했던 바람둥이 사내가 살았던 몇 백 년 전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에 대한 내용을 붉은 양장으로 가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긴 베네치아의 가면도 한 때의 유행이었듯이 붉은 양장도 한 때의 유행이었다.

결국 모험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 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사철 방식의 양장도 몇 백 년 동안 서가를 지켜내야만 했던 책들이 존재해야만 했던 시대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오늘날엔 아무런 호소력도, 그 어떤 경제적 가치도 지니지 못한 책이다. 아마 이 책을 낸 출판사로선 한 번 모험을 해본 것이요 이 책을 구입한 이는 분명 오늘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 착오적 감수성의 소유자일 것이다.

베네치아는 중세가 그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대서양이 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어가는 시기까지 유럽 최고의 도시라는 명성을 가지기 시작하고 그 명성을 잃어간다. 카사노바가 살았던 시기의 베네치아는 한때 대단했던 명성이 과거의 영화가 되고 있었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연일 축제가 이어지던 가면 무대의 도시였다. 이런 도시 속에서 매일 밤 그 내용이 달라지는 연애 극에 등장하는 단역 배우와 같은 인생을 사는 카사노바는 이 도시의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사랑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언젠가는 이 도시처럼 죽을 거란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정처 없이 떠돌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키스를 나누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우아한 애로티시즘 속으로 빠뜨렸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펀치를 만들었고 굴을 먹으면서 입 속에 들어 있는 굴을 서로 바꾸어 먹는 놀이를 했다. 내가 내 입 속에 든 굴을 그녀의 입 속으로 밀어 넣을 때 그녀도 자기 입에 들어 있던 굴을 혀 위에 올려놓고 나에게 내밀었다. 두 연인이 벌이는 장난만큼 사람을 흥분시키고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움이 그 매력을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웃음 역시 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의 입 속에서 미끄러져 나온 굴 소스는 얼마나 환성적인 맛인지! 더군다나 그건 그녀의 침이 아닌가! 내가 그런 굴을 깨물고 삼킬 때 사랑할 힘이 더욱 샘솟는 건 당연한 일이다.
- 자코모 카사노바의 <사랑의 유희> 중에서

우리는 18세기의 베네치아, 그리고 그 속의 카사노바를 보면서 그 시기 유럽을 물들였던 로코코의 슬픈 모습을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노동을 하고 땅의 논리에 순응하기 보다는 장사와 무역에 주력하는 자신들의 삶은 신성한 것이며 현세에서의 근면 성실함으로 내세에서의 운명을 만들어내겠다는 부르주아지들과 개신교도들의 북부 유럽 도시의 눈에 남부 유럽의 베네치아는 과거 유럽의 영화를 간직한 채, 연일 계속되는 축제와 파티로 자신들의 쌓인 피로를 잊게 해주는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지로서만 의미를 가지듯이, 카사노바의 인생도 18세기의 개신교 부르주아지의 도덕으로 보자면 더럽고 추잡하며 악하고 입에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유형의 삶이었을 테지만, 그러한 개신교 부르주아지가 결국엔 자신의 신분과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영혼과 육체를 갉아먹는 것보다야, 가면 축제로만 일년의 반 이상을 보내고 떠들썩한 공연장과 술집으로 즐비한 베네치아나 이미 식어버린 사랑을 결혼이라는 제도로 옭매어 살아가는 거짓된 이들보다 늘 새로운 사랑과 연애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던지는 카사노바의 인생이 더 진실된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아직까지 개신교 부르주아지의 삶과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잠시의 휴식으로 적당한 책이 되지 않을까. 하긴 그 정도만이라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사랑이 식었고 자신의 노동이 입에 풀칠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카사노바의 베네치아>>는 어떤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해주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