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

지하련 2019. 4. 30. 18:20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지음), 후마니타스 






사라지고 버려지고 남겨진 것들에 대해서만 씌여진 책이다. 호수가 말라가고 대지가 바다에 잠기고, 플라스틱과 비닐이, 먹지도 않은 음식물이 버려져 폐허처럼 쌓여갈 때, 그 옆에선 국적없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다 우리 탓이다. 이 시대의 문명, 도시, 자본주의로 인해 사라지고 버려지고 남겨져, 저기 저 곳에 갇힌 채 사람들은 가난과 분쟁, 폭력과 억압, 그리고 독재자 밑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다가 고대 문명의 폐허 속으로, 혹은 현대의 부유하는 쓰레기들과 함께 잊혀질 것이다.  




출처: https://www.travel-in-portugal.com/beaches/praia-do-barril.htm 




포르투칼의 타비라섬은 바닷가 모래 밭에 녹슨 닻 수백 개가 꽂혀 있어, '닻들의 묘지'라 불린다. 이 배들과 닻들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91쪽)



저 닻들은 오늘 무슨 생각할까. 어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 먼 과거에는 어느 배에서 어느 대양을 누볐을까?  세월이 흘러 사라지고 버려지고 남겨지는, 황량해지는 풍경 옆으로, 찬란했던 과거의 흔적은 우리에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 사라지고 버려지고 남겨지는 것은, 저런 과거의 흔적들 만이 아니다. 책을 펼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그만큼 무거워진다.  



보아스르가 사용했던 보 언어는 약 6만 5000년 ~ 7만년 전 생성되었다고 추정되며 이때까지 남아있던 세계 여러 언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인도 언어학자로 보어를 연구해 온 안비타 아비 Anvita Abbi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해 온 언어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269) 


영국 식민지와 태평양 전쟁, 일본군의 점령, 2004년 아시아 쓰나미 등 온갖 풍파를 헤치고 살아온 보아는 생전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마침내 자신만 남게 되자, 힌디어를 배워 의사소통을 했지만, 할머니가 불러주는 옛 노래들을 부족 아이들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270) 



언어는 하나의 세계다. 하나의 태도이며 가치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그래서 언어마다 고유의 태도, 가치관이 묻어난다. 이누이트의 언어 속에 무수한 얼음들이 있듯, 어떤 언어들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인식케 한다. 보아스르가 죽고 보 언어가 사라졌다. 


한국인이라곤 찾기 보기 힘든 어느 타국의 구석진 곳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떠올려본다면, 보아스르가 겪었을 외로움과 고통, 그 슬픔은 말로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은 전 세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가지고 온 어떤, 절망적인 풍경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저자는 최대한 건조한 언어로 사실만을 열거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뒤로 밀리기 일쑤. 저자의 어조에 지금 이 세상에 대한 답답함이 묻어나오고.   



세계에는 200개 가까운 나라가 있고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어느 나라에든 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서 1000만 명이 어떤 국적도 없이 살아가며, 10분 마다 한 명 씩 국적없는 아이가 태어난다. 



선진국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는 아니라고 할 지 모르지만,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하지만 우리의 오늘이 힘든 탓에, 선진국이라는 걸 체감하지 못한다. 그만큼 빈부를 포함하는 이런저런 격차가 심해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전 세계로 눈을 돌릴 틈이 없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제 우리만의 문제란 없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하나의 문제는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 제주도의 난민 사태 또한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중동의 문제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잠시 이스라엘 이야기가 나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알아갈수록,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이라고 하면 고개부터 돌리게 된 지도 꽤 되었지만, '미즈라히'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 같은 종교와 풍습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들의 일부인 아랍계 유대인을 차별한다.



이스라엘은 자국 내 아랍계를 차별하고 2등 국민으로 취급하면서 '유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세상 곳곳의 유대인을 불러들인다. 하지만 세계에 흩어져 살아온 유대인 집단이 현대 이스라엘에서 모두 등등한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튀니지나 이라크, 예멘 등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이들은 미즈라히로 불린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10여 년에 걸쳐 미즈라히 유대인 아기 수천 명이 사라졌다. (330) 



책은 쉽게 읽히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지금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황폐하게 변해가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 세계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둔감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저자 구정은(딸기)님의 블로그! 

https://ttalgi21.khan.kr/

(* 블로그 스킨 바꾸면서 링크가 사라졌군요. 이 스킨은 그 기능을 지원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 10점
구정은 지음/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