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하련 2019. 6. 13. 19:54





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지음), 21세기북스 


TV에 나온 김정운 교수를 보고 다소 가벼워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성실한 학자의 이미지보다는 대중적인 지식인에 가까워 보였다. 다소 부정적인.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볍다는 인상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전에는 부정적인 의미였다면, 지금은 원래 가볍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성실한 학자의 진지함 같은 것과는 무관한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셈이다. 

 

이는 이 책 <<에디톨로지 - 창조는 편집이다>>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저자의 고민이 깊게 묻어나오고 꽤 성실하게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가 꽤 길게 메모를 하였다. 


이 책의 결론은 분명하다. 편집이 중요하다는 것. 이제 편집된 지식이 중요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편집되어 어떻게 새로운 지식이 나오는가(창조)에 대한 언급은 부족해 보인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편집을 통해서 나올 수 있으나, 세상을 바꾸는 어떤 지식이나 학설은 편집만으로 될까 하는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편집의 중요성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 해 놓은 부분을 옮긴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았다. 모두 김정운 교수의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옮기고 편집한 내용이다. 이 점에서 그는 상당히 솔직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일본문화는 '저수지 문화'
"일본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들인다!" - 가라타니 고진 
- 7쪽 


'이이토코도리', 즉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일본식 문화 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마츠오카 세이고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아예 '방법으로서의 일본'을 주장한다. 일본 문화에는 특별한 주제가 없다는 거다. 따라서 특별한 내용의 일본 정체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것들이 대립이나 갈등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잇는 바로 그 편집 방법에 일본의 정체성이 있다는 거다. 
- 9쪽 


그래서 일본은 미래가 없다고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 폐쇄적이며 고립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정운 교수는 상당히 우호적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은 상대방의 정서 표현을 그대로 흉내내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의 작용이다. 거울 뉴런은 인간의 공간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의 기본이 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정서를 공유하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 346쪽 


책을 읽다보면 심리학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김정운 교수의 전문 분야가 '문화심리학'이다. 그러니 당연한 것이다. 


천장의 높이만 조금 더 높여도 창조적이 된다. 미네소타 대학의 마이어스-레비 J.Meyers-Levy 교수는 천장 높이를 30센티미터 높일 때마다 사람들의 문제해결 능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관점이 거시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반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서는 사물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 204쪽 


공간의 조직 방식, 즉 공간 편집이야말로 문화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학자는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다. 사는 공간의 크기나 구성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거리도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점에 주목한 홀은 '프록세믹스proxemics, 근접학'이라는 개념으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상호작용의 양상을 분류한다. 그의 프록세믹스에 따르면 상호작용의 내용을 결정하는 사람 간의 거리는 다음 네 가지로 나뉜다. '친밀한 거리 intimate distance',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공적 거리public distance'. 
- 205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 <수태고지 Annunciation>, 1472 ~ 1475, 우피치 미술관 

(* Painting by Andrea del Verrocchio and Leonardo da Vinci)


바로 이것이다. <수태고지>에 숨겨진 비밀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소실점이 변한다'는 것이다. (... ...) 

<수태고지>에는 '객관성은 주관성을 전제로 한다'는 변증법적 모순이 숨겨져 있다.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버금가는 혁명적 인식론이다. 
- 153쪽 


위 문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많은 벽화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에 변화를 주면서 그려졌다. '혁명적 인식론'은 살짝 오버한 느낌이 있지만, <수태고지>는 벽화가 아닌 탓에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유럽의 주택에 복도라는 공간이 생겨 각 방이 독립된 것은 18세기 이후다. 그 전까지는 다른 방으로 가려면 반드시 가운데 방을 지나가야만 했다. 
- 208쪽 


출처: http://algogaza.com/item/versailles/


베르사이유궁 구조를 보면 왕의 아파트, 왕비의 아파트가 있다. 그런데 저 방들은 모두 오픈된 형태다. 실제 베르사이유 궁에 갔을 때, 나는 전시 목적으로 열어두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원래 문이 있는 방의 개념이 없었다. 방과 복도는 하나였고 끝에 있는 방을 가기 위해서는 모든 방을 거쳐 가야 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그걸 이 책을 보고 알았다. (필립 아리에스의 아래 언급이 나온 책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 읽지 않았던 탓에) 


실제로 침실, 거실 같은 주택 내부 공간을 지칭하는 개념이 나타난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것이 필립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 ...) 

또한 외부로부터 단절된 공간에 부모와 자식만으로 구성된 단란한 가족만이 살게 된다. 이제 가족 구성원의 모든 관심은 어린 아이에게 집중된다. '보호받고 양육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사랑스러운 아이'는 이러한 공간의 편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 209쪽



에디톨로지 (반양장) - 8점
김정운 지음/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