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칼 슈미트

지하련 2020. 12. 13. 12:55



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칼 슈미트(지음), 김항(옮김), 그린비 




1.

서양철학사를 여러 권 읽었고 철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다소 어려웠다. 읽으면서 직장인인 내가 지금 왜 이 책을 읽고 있나 하는 질문을 수시로 하면서, 동시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가 왜 그렇게 재미없었는가까지 떠올렸다. 실은 아감벤의 책을 읽기 전에 칼 슈미트를 먼저 읽어야 했다. 그래야 아감벤의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조르조 아감벤 뿐만 아니라 칼 슈미트는 현대의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학자였다. 발터 벤야민, 하이에크, 루카치, 레오 슈트라우스, 하버마스, 데리다까지. 그만큼 중요한 질문을 던졌고, 정작 칼 슈미트는 (극단적인) 우파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도리어 좌파 진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까지. 



2. 

최근 조르조 아감벤의 '마스크 반대'를 한다는 것에 대해 국내 일부 식자들의 비난을 읽었다. 아감벤이 지난 10월에 짧게 발표한 '마스크와 얼굴'이라는 글 때문이지만, 실은 그 전부터 아감베는 마스크를 반대해왔다. 그런데 뒤늦게 왜? 이미 올 여름에 번역 출간된 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 패닉>>에서도 언급되었는데. 그리고 무분별한 비난보다는 아감벤의 철학 안에서 그의 주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감베는 예외상태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학자이다. 칼 슈미트에 영향을 받으며 그에게 대항한다. 아감벤은 각국의 정부들이 현 상태를 과격하게 '예외상태'로 몰아가고 있으며 이것이 파시즘과 뭐가 다른가 묻는 것이다. 


나는 유럽인들이 코로나 사태를 두고 행하는 유럽 정부들의 정책을 두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럽의 역사를 다시 생각했다. 그들이 어떻게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정부가 전제군주정(?)처럼 '공공보건'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동시에 한국 정부의 코로나로 인한 제한 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마음 속으로 칼 슈미트처럼 어떤 '독재'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3.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이미 상당히 많은 번역서가 있는 법(철)학자이며, 근대 '주권론'에 대해 깊은 논의를 이끌어냈으며, 동시에 나치에 관여한 이력이 있는 학자이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그것은 사실이며 몇 년 간 옥살이를 하였다. 나치에서도 끌어들이고 싶어할 정도의 강력한 우파 정치학자이며, '주권'과 '예외상태' 그리고 근대 국가와 헌법에 대한 깊은 논의와 예리한 통찰로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들을 읽고 연구하는 학자이다. 


이 책은 '주권', '예외상태','국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근세-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정치의 구조가 종교-왕정-의회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 어떻게 합리화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칼 슈미트는 이런 이유로 '정치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신학에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들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전능의 신이 만능의 입법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여러 개념이 신학에서 국가론으로 옮겨 갔다는 역사적 발전을 봤을 때만이 아니라, 이들 개념의 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체계적 구조를 봤을 때도 그렇다. 법학에서 예외 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유비관계를 의식했을 때 비로소 최근 수백 년간에 걸친 국가철학상의 여러 이념의 발전이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이신론(理神論)으로 지탱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때 이신론이란 하나의 신학이자 형이상학인데, 이는 기적을 세계로부터 추방하고 기적 개념 속에 내포된 자연 법칙의 중단, 기적의 직접 개입을 통해 예외상태를 설정하는 중단을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행 법질서에 대한 주권의 직접 개입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계몽사상의 합리주의는 어떤 형식의 예외상태이든 모두 부정했다. 따라서 반혁명의 보수적 저술가들은 유신론적 확신을 가졌으며, 유신론적 신학과의 유비 속에서 군주의 인격적 주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54쪽 ~ 55쪽) 


15~1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 바로크철학의 신(神)에 유비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17세기 군주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19세기 '중성' 권력, 그리고 '집행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순수 조치-행정국가의 표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정치신학적 사유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이다. (8쪽)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바의 주권은 장 보댕의 것이다. "주권은 공화국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이다"라든가. 하지만 주권에 대한 논의는 근대국가 형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틀이다. 이 책의 1장은 주권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16쪽)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즉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이 상태가 되면 법은 후퇴하는 반면 국가는 계속 존립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예외상태란 그럼에도 무정부상태나 혼란상태와 다른 무엇이기 때문에, 법질서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법학적 의미에서 하나의 질서가 존속한다. 

(... ...)

예외사례에서 국가는 이른바 자기 보존의 권리에 따라 법을 효력정지시키는 것이다. '법-질서'라는 개념의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게 되며, 각각의 개념적 독립성을 표명한다. (24쪽)


그리고 자연스럽게 국가의 정의와 법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즉 국가에 대한 법학적 사유에는 순수 법학적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하며, 그것은 규범적으로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법질서의 바깥  혹은 곁에 있는 현실이나 그 언저리에서 이뤄지는 구상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자기 충족적이고 독립적(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아무런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법질서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국가는 또한 법질서의 창출자도 원천도 아니다. 켈젠에 따르면 그런 모든 표상은 의인화이자 실체화이며, 이는 단일하고 동일해야 하는 법질서를 상이한 주제로 양분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켈젠에게 국가, 즉 법질서는 궁극적 귀속점과 최종규범이 속하고 있는 귀속의 체계인 셈이다. (33쪽) 


하지만 이 논의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칼 슈미트에 대한 이런 저런 글들을 찾아 읽을 수 밖에 없었으며, 그가 결국 '독재'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였으며, 강력한 주권 국가의 존재를 바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 <<정치신학>>은 그의 이런 입장에 대한 배경이 되는 이론적, 철학적 논의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논의는 많은 학자들의 이론들을 인용하면서 전개하기 때문에 이를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이 책의 4장 <반혁명 국가철학에 관하여 - 드 메스트르, 보날드, 도노소 코르테스>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주권과 예외상태, 국가와 법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독재를 향해가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의 자유주의적 입헌제는 의회를 통해 국왕으로부터 힘을 빼앗으면서도 그를 왕좌에 앉혀놓으려 한다. 이는 신을 세계로부터 추방하면서도 그 존재에 집착하는 이신론이 법한 바 있는 동일한 논리적 모순이다. (82쪽) 


도노소 코르테스는 더 이상 군주가 있을 수 없기에, 그리고 인민의 의지를 통해 군주가 되는 일 말고는 군주가 되려는 용기를 가질 자가 없기에 이제 군주제가 끝났음을 알아차렸고, 그러자마자 스스로의 결단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그는 정치적 독재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드 메스트르의 표현 속에서 국가를 결정의 계기로 환원하는 생각이 이미 깃들어 있었는데, 이는 합리화나 토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또한 정당화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無)로부터 내려지는 절대적 결정, 즉 순수 결정으로 국가를 환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독재이지 정통성이 아니다. (89쪽) 


그리고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은 다음과 같은 기묘한 역설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반신학적 신학자이며, 실천적으로는 반독재적 독재자일 수 밖에 없었다는 역설이다. (90쪽) 



4.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는 예외 상태인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국가를 존속시킬 수 있는 초법적인 명령을 실행하고 강제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심지어 이런 논의를 할 틈도 없이 그것들은 시행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학적으로, 법학적으로 옳은 일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아감벤에게 쏟아진 비난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 좌파적 사고에서 아감벤의 지적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대체로 한국의 지식인들은 레디컬하지 않아 보인다. 



5.

상당히 얇은 책이지만(이 때문에 구입하고 읽으면서 후회했다), 칼 슈미트가 제시하고 논의하는 바의 울림은 작지 않다. 그냥 현재의 국가나 법, 주권 등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게 하는 국가, 정치, 법률에 대한 기본적인 것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왜 지금/여기가 이 모양 이 꼴인지. 다른 글을 읽은 바에 의하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라는 배경 속에서 칼 슈미트의 이론은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처럼 현대 정치도 별반 다르지 않아, 칼 슈미트는 아직도 읽히고 논의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가 빡빡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칼 슈미트의 책을 추천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칼 슈미트는 읽어야 하는 학자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아감벤 말고 칼 슈미트를 읽자. 



이 책의 제목을 보라. 칼 슈미트 사상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위 책은 이러한 칼 슈미트의 사상이 전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논의한다. (아마 이 책도 번역될 듯 싶다. 그 때 읽어야지. 칼 슈미트 사진을 찾다가 이 사진을 발견함)

아마존의 책 소개. Carl Schmitt (1888-1985) was one of the twentieth century’s most brilliant and disturbing critics of liberalism. He was also one of the most important intellectuals to offer his services to the Nazis, for which he was dubbed the “crown jurist of the Third Reich.” Despite this fateful alliance Schmitt has exercised a profound influence on post-war European political and legal thought―on both the Right and the Left. In this illuminating book, Jan-Werner Müller traces for the first time the permutations of Schmitt’s ideas after the Second World War and relates them to broader political developments in Europe.



정치신학 - 10점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그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