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눈물들, 파스칼 키냐르

지하련 2021. 3. 21. 23:18

 

눈물들Les Larmes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지음), 송의경(옮김), 문학과지성사 

 

 

키냐르, 때때로 생각나는 이름. 그러나 한동안 읽지 않았던 작가. 오랜만에 한 권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 <<은밀한 생>>을 읽은 후, 감동을 받은 후,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었는데, <<은밀한 생>>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어쩌면 <<은밀한 생>>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 10여 장으로 구성된 10권의 책이라는 좀 특이한 목차를 지닌 이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프랑스어가 태어나는 순간'의 현장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247쪽) 

 

역자의 설명대로 이 책은 최초의 니타르Nithard에 대한 소설이다. 다시 말해, 니타르(라틴어로 니타르두스 Nithardus)는 842년 2월 12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를 2세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 사이의 협정문인 '스트라스부르크 서약'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서약문은 최초의 프랑스어 문헌이며, 로망스어 문헌으로 평가받으며, 또한 독어학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헌이기도 하다. 

 

842년 12월 서프랑크에서 카를 2세에 의해 작성된 스트라스부르크 서약 사본

 

파스칼 키냐르는 최초의 프랑스어가 탄생하는 그 시대를 옮겨놓고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역사소설처럼 여겨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분절적으로 나타나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거대하고 풍부한 서사적 구조물을 만든다. 우리는 역사적 풍경들을 하나의 흐름(그것이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시간들은 끊어지고 사건들을 병렬적으로 나열된다. 나타르는 실존 인물이지만, 아르트니는 허구의 인물이다. 일종의 은유이면서 프랑스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순간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가 이렇게 만들어 질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을 키냐르를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어에 대한 것이므로, 중세 프랑크 왕국의 많은 이들이 등장하니, 이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프랑스독자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가 소설은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키냐르 특유의 시적인 흐름만이 한국의 독자가 이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내가 키냐르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지자 이사야가 외쳤다. "Vae qui scribunt, scribentes enim scribunt nequam!"(글을 쓰는 자들은 불행할 지니, 글을 씀으로써 쓰면 안 될 것을 쓰기 때문이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다. 이사야가 헤브라이 종족에게 외침으로써 경고한 바는 적확하다. 창작하는 이들의 남다른 시선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몸 깊은 곳에서 발원된다. 옛날의 삶 밑바닥에서 발아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옥에서 비롯된다. 죽은 이들에게서 나와, 곧장 야수의 세계로 하강해서, 옛날로부터 떠오른다. 

찡그리는 이마, 좁혀지는 양미간, 드리우는 침묵, 정지되는 손, 이 모든 게 신기하게도 하나로 집중된다. 

예상가능한 온갖 경우와 가장 완벽한 침묵 가운데 미처 표현을 찾지 못한 황홀경, 시선이 멍해지는 사색, 탐문 탐색하는 해몽 점, 수수께끼, 이런 것들은 산 사람들이 아닌 다른 데서 생기거나 태어난다. 

이런 것들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향한다. (123쪽) 

 

그러나 파스칼 키냐르를 읽지 않았다면, 읽어보기를.

소설의 시적인 아름다움을 깨닫기에 파스칼 키냐르같은 작가도 없을 것이니. 

 

 

눈물들 - 8점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