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하련 2021. 7. 22. 22:31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

엠마누엘 레비나스(지음), 강영안(옮김), 문예출판사 

 

 

1996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고 나는 1997년에 구했다. 그 이후로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첫 문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외롭다는 생각, 혹은 그런 경험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무서워했던 걸까.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우리는 이 강의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다. (29쪽)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살펴보며 자아(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탐구를 해나간다. 유행하는 철학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면서도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결국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Miteinandersein)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함께(mit)라는 전치사는 여기서 관계를 묘사한다. 어떤 것 주변에 공통의 관계항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특히 진리를 한 가운데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하는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face 'a face)'관계가 아니다. (31쪽) 

 

레비나스는 타자를 바라보고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철학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것은 윤리학이었다.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다. 나는 대상을 만진다. 나는 타자를 본다. 하지만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의 존재,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존재함은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우리는 어떤 존재자라도 서로 교환할 수 있다. 존재(^etre)는 이런 의미에서 존재함(exister)에 의해 스스로 고립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자(monade)이다. 문도 창문도 없이 내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함' 때문이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내용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34쪽)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있고, 깊이를 얻으며, 열려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 레비나스 (역자 해설 중에서 인용) 

 

그리고 이 책에서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홀로서기의 사건, 이것은 현재이다. 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로부터의 출발이 곧 현재이다. 현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존재의 씨줄에 생겨난 하나의 균열(찢음)이다. 현재는 찢어내고 다시 맺는다. 현재는 시작한다. 그것은 시작 자체이다. 현재에는 과거가 있지만 기억의 형태로 간직하고, 역사가 있지만 그 자체는 역사가 아니다. (47쪽)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浸蝕)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계이다. 시간의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 (93쪽)

 

얇고 단단한 책의 서평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구나. 타자에 대한 책이면서 데카르트적 자아에 대한 반성이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 아닌 것'에 대한 연구, '타자'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한 철학자이면서 그것이 레비나스 철학 대부분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바 '타자'에 대한 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타자'는 내가 아닌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레비나스의 '타자'는 나(데카르트적 자아)로부터 시작하여 '타자'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전자가 재현적이며 예술 양식으로 표현되었자면, 후자는 철학적 반성 속에서 윤리학을 향하는 이론적 과정을 보여준다.

 

솔직히 쉽지 않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사고 거의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었으니. 그 사이 레비나스의 주저들이 번역되었고 여러 권의 안내서들도 나왔다. 아마 내가 읽으려고 노력했던 때보다 훨씬 접근하긴 쉬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레비나스의 책 몇 권을 주문했다. 이제서야 레비나스가 읽힌다는 사실에 스스로 기뻐하면서. 

 

모든 사물의 부재는 하나의 현존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장소로, 대기의 밀도로, 텅 빔의 가득 참으로, 침묵의 중얼거림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파괴된 후 존재하는 것들의 비인칭적인 <힘의 장(場)>이 있을 뿐이다. (40쪽) 

 

Emmanuel Levinas© Photographed by Bracha Ettinger